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방이 Oct 06. 2020

메트로폴 호텔에 가고 싶다

모스크바의 신사

<모스크바의 신사>는 러시아 혁명 시기, 귀족이라는 이유로 모스크바의 메트로폴 호텔에 종신 연금에 처한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의 1922년부터 1954년까지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한 번 잡으면 놓기 어려울 정도로 재밌다. 메트로폴 호텔이라는 협소한 장소가 배경의 전부이지만 백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다양하고 흥미롭다.


혁명의 상황은 어둡고 무겁지만, 재판장에서 보여준 백작의 유머만큼이나 소설의 필체는 경쾌하고 가볍다. 선과 악의 뚜렷한 대립도 없다. 비숍이라는 캐릭터 역시 악으로 규정된다기보다 다소 얄미운 캐릭터 정도로 다뤄진다. 빌 게이츠가 왜 휴양지에서 읽기 좋은 책으로 선정했는지 이해가 된다. 인간적 고뇌가 심각하지 않다는 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처럼 머리 싸매고 읽을 필요도 없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그저 기분 좋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작품 덕분에 사랑받는 도시는 많다. 런던은 <셜록 홈즈> 덕분에 수많은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영화 <로마의 휴일>을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 계단에서 아이스크림을 떨어트렸던가. <미드나잇 인 파리>는 파리의 밤거리를 더욱 낭만적으로 만들었다.


<모스크바의 신사> 역시 읽고 나면 당장 모스크바 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호텔 문을 열고 프런트의 '아르카디'에게 백작이 머물렀던 스위트룸 317호를 체크인하고, 러시아 최고의 식당인 보야르스키에서 지배인 안드레이의 추천에 따라 음식을 주문하고 최고의 주방장 에밀의 요리를 맛보고 싶다. 물론 식당에 앉아 식사 시간을 즐기는 여배우 '안나 우르바노바'의 우아함을 힐끔거리며, 귀여운 '니나 쿨리코바'의 호기심에 대해 상상할 것이다. 식사를 마치면 호텔에 있는 이발소에서 야로슬라블에게 이발과 면도를 부탁할 것이다. 밤에는 지붕에 올라가 도시를 감상하며 아브람과 '꿀벌의 습성'에 대해 대화를 나눌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 백작이 감금됐던 다락방에 들려 드로셀마이어 선생(애꾸눈 고양이)과 함께 의자에 앉아 백작처럼 몽테뉴의 <수상록>을 한 없이 읽고 싶다.


백작은 애국자이고 자신만의 원칙이 있지만 <오베라는 남자>와 같은 꼰대는 아니다. 소설에서는 로빈슨 크루소와 비교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의 기질은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긍정성을 발휘하는 <빨간 머리 앤>과 닮았다. 물론 앤 셜리는 말괄량이고, 백작은 신사라는 점은 다르다. 백작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자신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질 수도 있는 재판장에서조차 유머를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발소에서 과격한 손님에게 수염이 잘려도 지구의 자전과 우주의 바퀴를 상상하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듯 극복, 아니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도스토옙스키라면 무너져가는 귀족의 정신과 심연에 대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겠지만, 작가 에이미 토올스는 '그래도 이렇게 하면 재밌겠는 걸' 하는 식으로 그저 유쾌하게 퉁 쳐버린다. 감옥 같은 작은 방에 갇히자 그동안 두껍고 어려워서 엄두도 못 냈던 아버지의 책 <수상록>을 드디어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하는 것처럼, 백작은 시궁창에서도 꽃을 심는 사람이며, 짓밟는 군홧발 아래서도 박자를 맞춰 춤을 출 수 있는 인간이다. 신사의 품격을 잃지 않으며 언제나 올곧고 유쾌한 삶을 살아가는,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이자 경마클럽 회원이며 사냥의 명인인 모스크바의 신사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러시아 혁명도 결국 인간의 행위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다. 혁명의 원인이나 동기는 거대하게 포장되지만, 가끔 역사는 사소한 동기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렇게 촉발된 역사의 흐름이 어떻게 개인의 사소한 삶에 침투하고 변화시키는지 보여준다.


작가는 러시아 혁명이 어리석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 하나하나는 모두 그만한 이유와 치열함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공산주의 속 인물들도 모두 똑같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이끌어냄으로써, 모스크바를 사랑스럽고 친근한 도시로 만들었다.


백작의 일생을 함께 하는 독자는 온몸으로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게 된다. 어느 누구도 완벽한 인물은 없듯이, 어떤 환경도 완벽할 수 없다. 우리가 환경을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려는 의지를 드러낼 때 삶은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소설은 이야기한다. 메트로폴 호텔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백작과 함께 세계를 이해해가는 경험은 삶의 깊은 혜안과 통찰을 준다.



작가의 이전글 이제 내가 널 사냥할 차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