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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방이 Feb 04. 2022

Viva La Vida(인생 만세)

꿈과 현실 사이에는 늘 괴리가 있다. 수년 전 나는 느닷없이 - 아마 TV를 보다 떠올렸던 것 같다 - 서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다에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자유자재로 파도를 타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인터넷 검색으로 서핑을 가르쳐주는 곳을 찾아 호기롭게 동해로 떠났다. 푸른 파도와 예쁜 여자들, 그리고 나의 서핑 보드.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파도를 타기는커녕 보드 위에서 3초도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계속 바닷속으로 풍덩하고 고꾸라지기만을 반복했다. 마치 갓 태어난 송아지가 서핑을 타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꼴 사나운 모습이었던가. 아, 나는 서핑에 소질이 없구나를 절실히 깨닫는 시간이었다.


2017년에는 역시나 느닷없이 피아노를 배워볼까 하고 연습을 시작했다. 그 해 나는 '콜드플레이' 공연을 보았고 한동안 '콜드플레이'에 약간 미쳐 있었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보컬 '크리스 마틴'에 반했던 것이다. 내 몸에 '피아노를 치는 락커'의 피가 흐를지도 모른다는 상상과 함께 '콜드플레이'의 최대 히트 곡인 'Viva La Vida'를 연주하는 내 모습을 꿈꿨다. 멋져 보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역시는 역시였다. 현실에서는 '생일 축하송'을 치는 데에도 거의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를 연습하다 나는 그만 질려버렸다. 내 손가락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나는 피아노 저능아처럼 보였고 손가락들은 마비된 것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스운 꼴로 음표 하나하나를 겨우겨우 쳐내는 내 손가락을 바라보다 나는 내 손가락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강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더 버틸 필요 없이 그날 밤 난 피아노에서 손을 떼고 내 손가락들을 치킨과 캔맥주를 집는 데 사용했다. 그 순간 나는 극도의 평온함과 기쁨을 맛보았다. 아, 좋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Viva La Vida(인생 만세)'를 외쳤다!


여러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지만 - 나는 꼭 겪어봐야 안다 - 하고 싶은 것과 현실 사이에는 늘 괴리가 있다. 우리가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하면 스포트 라이트를 받는 무대 위의 그 화려한 상태를 동경하는 것이지, 무대 뒤에서 흘리는 땀과 눈물은 고려하지 않는다. 매년 초에 하고 싶은 것을 다이어리에 쓰다 보면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지만 연말이 되면 이룬 것이 하나도 없어 허탈하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화려한 결과 뒤에 숨은 지루하고 힘든 과정까지 좋아해야 한다. 마비된 것 같은 손가락을 건반에 하나하나 옮기는 그 힘든 과정을 사랑할 수 있을 때 '난 피아노 치는 게 좋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나는  지루하고 힘든 과정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빛나는 순간의 이미지만으로  일에 뛰어들곤 했다. 물론 그런 화려한 순간에 대한 동경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있어야 지루한 과정을 버틸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과정은 고난이기 때문이다.


핸드드립 커피도 그런 식으로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빈으로 여행 갔을 때였다. 나는 벨베데레 궁전과 그리 멀지 않은 호텔에 묶었다. 아침을 먹기 위해 호텔 로비에 마련된 카페에 들렸다. 카페는 사방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바깥이 훤히 보여 오스트리아의 아침 거리를 감상하기에 충분했다.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고 'Daniel Powter'의 'Bad Day'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때 점원이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분위기에 취해서였을까? 나를 보고 씨익 웃는 그가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멋있어 보였다. 'Bad Day' 가사 중에 'You're faking a smile with the coffee to go'라는 가사가 있는데 지금 상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 오자마자 핸드드립 용 주전자와 드리퍼, 그리고 수동 분쇄기를 샀다. 아마도 나는 스스로 커피를 내리는 내 모습에서 오스트리아 청년이 풍기던 분위기를 발견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는 내 모습을 내내 상상하며 돌아왔다. 장소는 당연히 책으로 가득한 고품격의 서재이다. 따뜻한 전구색의 조명 있고, 책상 위에는 지적으로 보일 법한 한 권의 책이 놓여 있는 거다. 음, 그리고 스피커에서는 ‘Bad Day’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서재 정면에는 통창이 있어서 실록의 나무가 바람에 살랑거린다. 완벽하다. 그리고 나는 깔끔한 스웨터에 면바지를 입고 커피를 분쇄하고 커피를 내린 후 독서용 의자에 앉아 커피를 즐기는 거다. 낭만과 여유가 서재 가득 흐른다. 와우, 멋지지 않은가? 상상은 언제나 나를 가장 멋진 달나라로 보내준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달나라를 정복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그건 아마도 분명히 말하지만, 자장면을 시켜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는 일일 것이다. 지구에서 바라볼 때는 꿈과 희망이지만 막상 달에 발을 딛는 순간 현실이 된단 말이다(지구에서든 달에서든 배는 고플 테니까). 핸드드립 커피 역시 이상일뿐, 영화나 CF가 아니었다. 현실에서 커피를 내리는 나는 우선 스웨터를 입지 않는다. 커피를 내리는 시간은 대부분 아침이다. 자다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와 눈곱이 잔뜩 낀 몰골을 하고 있다. 면바지 대신 무릎이 잔뜩 나온 파자마와 목이 있는 대로 늘어나 잘하면 젖꼭지가 보일 것만 같은 티셔츠를 입고 있다. 커피 가는 모습 역시 여유와 기풍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수동 원두 분쇄기’는 원래 한 손으로는 몸통을 잡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돌려서 원두를 분쇄하는 방식인데, 막상 이걸 갈다 보면 보기보다 오래 걸리고 무척 힘이 든다. 처음에는 나도 정자세로 돌려보려 했으나, 어느새 분쇄기를 내 허벅지나 무릎 뒤 오금 사이에 껴서 돌리게 된다. 약간, 아니 무척이나 좀스럽고 보기 흉하다. 이게 현실의 내가 커피 가는 모습이다. 꿈과 현실 사이에는 늘 괴리가 있다.


‘No pain, No gain’이라고 했던가. 그래도 땀 흘려 분쇄기를 돌린 만큼 커피는 다행히 맛있다. 사실 커피를 핸드드립으로 내려 먹는 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알맞은 크기로 커피를 분쇄 - 너무 곱게 갈거나 굵게 갈면 커피가 맛없다 - 해야 하고 물도 펄펄 끓는 물 - 너무 뜨거운 물을 부으면 커피에서 탄내가 난다 - 보다는 약 70도의 온도가 적당하다. 드리퍼에 물을 부울 때에도 한 번에 확 부으면 안 된다. 우선 원두가 촉촉이 젖을 정도로만 물을 붓고 1분에서 2분 정도 숨을 들인다. 커피를 적셔 물길을 만드는 과정이다. 그러고 나서 주둥이가 길고 얇은 주전자를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돌리면서 일정량의 물을 조금씩 부어준다. 이렇게 세밀한 과정을 거쳐야만 맛있는 커피를 맛볼 수 있다.


이 정도의 수고라면 핸드드립 커피를 포기할 법도 한데, 몇 년째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는 중이다. 가장 큰 이유는 결국 핸드드립 커피가 맛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커피를 갈고 주둥이가 긴 주전자로 물을 붓는 과정을 내가 그리 싫어하지 않는 것 같다. 나름의 노하우도 생기고 제조 방법에 따라 커피맛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약간의 변태적(?) 희열도 함께 느낄 수 있어 기분이 좋다. 비 오는 날 오스트리아 빈에서 보던 청년의 분위기는 온 데 간 데 없지만 커피 향만큼은 '거짓 웃음'을 만들지 않는다. 커피 내리는 것도 이제 습관이 되어 귀찮다는 생각도 안 든다. 눈 비비고 이를 닦고 세수를 하듯, 커피 내리는 것도 아침 일과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서핑을 배우고 악기를 배우는 과정의 고통에 비하면 커피 내리기는 누어서 떡먹기다. 맛있는 커피를 맛볼 수 있어 'Real Smil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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