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축제>를 읽고
밀란 쿤데라는 38살에 <농담>을 썼습니다. 1967년이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낸 건 55살, <무의미의 축제>는 2014년, 85살에 냈습니다. 밀란은 평생을 '농담', '존재의 무게', 그리고 '무의미' 등에 천착해 왔습니다. 그의 대부분 소설이 이 주제를 핵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무의미의 축제>는 이 주제들이 직관적이고 유기적으로 집약된 소설입니다. 밀란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유작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저는 밀란이 대단한 소설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생을 같은 주제로 다른 형식을 빌려 예술 활동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85살이라는 고령의 나이에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훌륭하고 완벽한 소설을.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무의미의 축제>는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저에겐 황홀, 그 자체였습니다.
우선 <무의미의 축제>는 재밌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재밌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습니다. '왜 재밌지, 왜 재밌지' 혼자 의문하며 읽었습니다. 선명하거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있지는 않습니다. 러시아 소설처럼 등장인물의 심장이 작가의 손바닥에서 두근거리는 깊이 있는 심리묘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의미의 축제>는 농담처럼 분명 가벼운 소설입니다. 그만큼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무의미의 축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는 적막이라고 했던가요, 밀란의 '무의미'는 가장 '어려운 의미'이기도 합니다.
혹시 <무의미의 축제>의 표지를 보셨나요? 기이합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왼쪽 눈을 떼어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그림은 밀란이 직접 그렸다고 합니다. 그에게 손은 소설을 쓰는 도구이고 눈은 마음이라면, 소설 쓰기는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밀란은 늘 '인간'을 주제로 해왔습니다. 밀란은 말했죠, 소설가란 인간의 본성과 가능성을 찾아내 실존의 지도를 그리는 거라고.
<무의미의 축제>의 형식은 시트콤이나 인형극 같습니다.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과 배경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냥 등장합니다. 밀란은 그냥 '이거 소설이야', '이거 실재가 아니야' 하는 것 같습니다. 고전이라 불리는 근대 소설들은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소설의 배경을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등장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과거 역시 상세히 소개합니다. 그래야 설득력이 있는 소설이라 이해됐고 좀 더 실재적이라 여겼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나 발자크의 소설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너무 장황한 설명은 때때로 독자를 지루하게 만듭니다.
밀란은 배경과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을 가볍게 생략합니다.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약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밀란 쿤데라의 능력입니다. 각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통해, 또는 핵심 내용을 통해 우리는 충분히 소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설을 이해하는 데 딱 필요한만큼 배경과 등장인물이 설명됩니다. 군더더기가 없어 지루하지 않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밀란은 어릴 때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그의 소설에는 음악적 요소가 많이 드러납니다. 다른 대부분의 작품과 동일하게 총 7개의 장으로 구성됐습니다. 소설이 구성된 방식은 클래식 음악을 떠오르게 합니다. 책을 다 읽고 소설에 대해 떠올리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떠오릅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의 파티장에서 떠다니는 깃털을 묘사하는 장면은 웅장한 교향곡이 실제로 연주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밀란은 소설을 쓸 때 종종 대위법을 활용합니다. 대위법은 원래 두 개 이상의 독립적인 선율을 조화롭게 배치하는 작곡 기술입니다. <무의미의 축제>에서도 대위법을 주된 형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거 스탈린의 이야기와 네 친구의 이야기를 절묘하게 배치하여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상황이 조화를 이루는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아무 상관도 없는 두 가지 사건은 대위법을 통해 인간적 패러다임이 절묘하게 이어지는 효과를 보입니다.
먼저 스탈린의 이야기를 소개하면, 스탈린이 자고새 이야기로 농담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의 부하들은 스탈린의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스탈린이 형편없는 거짓말쟁이라며 비난합니다. 스탈린은 자신의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하들에게 화가 납니다. 스탈린은 자신이 하는 일은 '인류를 위한 일'이라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대외적'으로는 말이죠. 사실 스탈린은 '인류'라는 말은 허상에 불과하고 실재가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스탈린 스스로도 손에 만져지지 않는 '인류를 위한 일'에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고 정당화하는 건 말 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가 세계를 지배하는 동력은 아주 사소하거나 매우 사적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스탈린과 전체주의는 망했습니다. 소설에서 밝히는 전체주의가 망한 근본 이유는 스탈린의 농담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비효과처럼 아주 사소한 문제가 세계를 무너트리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밀란은 전체주의 사회를 겪은 세대입니다. 쿤데라는 탄압을 당하기도 했고 그의 저작은 체코에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밀란은 소설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래서 전체주의와 소설은 양립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밀란에게 소설은 농담입니다. 농담은 가볍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무거울 수도 가벼울 수도 있습니다. 밀란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사회, 즉 농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전체주의를 싫어했습니다. 스탈린은 스스로 농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농담이 통하지 않자 실망합니다. 그의 부하들은 화장실에 모여 그를 '거짓말쟁이'라고 욕을 합니다. <무의미의 축제>에서는 스탈린의 농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하들과의 '개인적' 심리를 코믹하게 묘사합니다. 그리고 '개인적' 심리가 역사를 변화시키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밀란이 역사를 끌고와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로 삼는 의도는 자명해 보입니다. 역사에 의도를 보여주거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아래 인터뷰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역사는 역사가 '인간의 본성'에 빛을 비출 때 의미가 있습니다. 수많은 역사가들이 짓밟고 간 '인간의 본성'. 심지어 너무 하찮아 보여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인간 본성' 자체에 대한 애정만이 그가 역사를 소설에 차용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내게 있어 역사적 상황은 복수, 망각,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역사와 인간의 관계, 본래 행위의 소외, 섹스와 사랑의 분열 등 나를 매혹하는 실존의 주제를, 새롭게 극도로 날카로운 빛으로 내리쬘 때만이 의의가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스탈린의 아들이 '똥' 때문에 자살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하찮아 보이는 이 죽음을, 밀란은 가장 숭고한 죽음으로 여깁니다. <무의미의 축제>에서는 칼리닌이라는 스탈린의 부하가 나옵니다. 그는 전립선 비대증 환자입니다. 심할 때는 5분마다 화장실을 가야합니다. 스탈린이 연설을 하는 동안 예의를 차리기 위해 화장실을 참습니다. 고군분투합니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며 내적 투쟁을 합니다. 밀란은 이 순간을 인간의 가장 숭고한 투쟁의 한 장면으로 꼽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인간 정신의 투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무의미의 축제>에서 등장인물들은 농담이나 거짓말, 또는 환상에 빠지거나 사람들을 상대로 거짓 연기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편의상 '농담'으로 묶어서 설명하면, 농담이 각각의 캐릭터와 상황, 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여줍니다. 존재의 무게가 농담으로 무거워지기도 하고 가벼워지기도 합니다. 또한 의미 있게도 무의미하게도 여겨집니다.
소설 속 다르델로는 라몽에게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다르델로의 거짓말에는 악의도 이익도 없습니다. 자신조차 왜 거짓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암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자, 다르델로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라몽은 원래 다르델로를 싫어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다르델로가 측은하게 느껴집니다.
라몽은 어릴 때 어머니를 이별하고 한 번도 만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뒤섞여 있습니다. 라몽은 스스로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해소합니다. 그런데 그 해소하는 방식이 그냥 혼자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상상'은 실제는 아니죠. 일종의 거짓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칼리방은 파티에서 파키스탄인 흉내를 내는 연극을 하면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샤를은 연극을 하고 싶어 하고요.농담, 거짓말, 환상, 그리고 연극. 모두 현실에서 비켜선 '농담'을 통해 달라지는 인간 존재의 무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나 철학, 아니면 과학이 바라보는 그 '농담'이 빚어낸 '존재의 무게'는 어떤가요? 엉뚱합니다. 특별한 사건도 아닙니다. 정말 하찮아 보입니다. 이건 사건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밀란은 거짓말로 변화되는 아주 미묘한 인간 본성의 세계를 포착합니다. 다르델로는 암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는 순간 남이 자신을 의미 있게 바라봐서 기분이 좋습니다. 바로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다르델로의 거짓말, 혹은 농담은 라몽의 공기 또한 바꿔놓습니다.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웃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스탈린은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 걸까요? 온 '인류'를 위해일까요? 소설에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명목상의 '인류'가 사실은 스탈린 자신의 투쟁이 목적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스탈린은 프로이센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를 칼리닌그라드로 개명합니다. 그 이유는 순전히 스탈린이 자신을 위해 투쟁하는 전립선 비대증 환자에게 애정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실 칼리닌은 역사적으로 무의미한 존재입니다. 아무런 실질적 힘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 의장이었지만 의전 상 국가 원수일뿐 죄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의 이름이 하나의 도시 이름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이마누엘 칸트'라는 전 세계인이 누구나 아는 철학자의 고향인 도시에. '칸트그라드'가 아닌 '칼리닌그라드'로 남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차리친은 스탈린그라드로 개명했으나 후에 볼고그라드로 바뀝니다. 레닌그라드는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되었고, 카를마르크스슈타트는 켐니치로 바뀝니다. 역사적으로 무거운 의미를 지녔던 이름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칼리닌그라드는 여전히 칼리닌그라드입니다. 스탈린에게만 통용됐던 그 전립선 비대증 환자의 도시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무의미'의 승리로 기록되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무의미'란 과연 무엇일까요? 거기에 왜 '축제'라는 단어를 붙였을까요? '무의미'와 '축제'는 얼핏 상충된 느낌도 받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또 일맥상통하는 면도 있습니다. 축제 자체가 사실 '난장'입니다. 토마토를 던지고, 진흙을 온몸에 바르고, 도심에서 성난 황소에 쫓깁니다. 처음에는 의미를 지녔을지도 모르지만 축제 자체는 무질서와 무의미를 연출합니다. 현실에서 비켜선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그 상태를 즐깁니다. 그리고 좋아합니다.
그런 면에서 무의미는 사회와 역사가 무게를 부여하지 않는 장소입니다. 인간이 고안해 낸 매우 중요한 의미의 영역, 그러나 사실 시간이 흘러 아무런 가치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무의미한 것들이 질서를 깨고 축제를 벌릴 때 인간은 '어떤 기분'이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소설을 읽고 나면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다닙니다. 소설은 쉽고 재밌어서 순식간에 읽을 수 있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들에 답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사실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밀란은 처음부터 '분명한 건 인간은 모호하다는 그 모호성일 뿐'이라고 말해왔으니까요. 그래서 소설을 100%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니 정답이 없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고, 더 정확하게는 정답은 독자 각각의 몫인 것 같습니다. <무의미의 축제>를 이 잡듯 분석하며 읽는 게 맞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모호함을 내버려 두더라도 인간 본성에 대한 테마를 생각해 보는 충분한 계기는 될 것 같습니다.
<무의미의 축제>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세계에 대한 마침표 같은 소설입니다. 묘비명에 쓰인 농담처럼 쓸쓸한 측면도 있습니다. <무의미의 축제>는 깃털처럼 가볍지만 다시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저는 밀란이 던진 농담을 들고 체중계에 올라갔습니다. 천천히 흐르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들리는 듯합니다. 체중계 바늘을 봤습니다. 처음에는 바늘이 돌고 돕니다. 갈피를 못 잡고 돌고 돌고 계속 돕니다. 그러다 밀란의 <무의미의 축제>의 표지를 봤습니다. 손에 든 눈과 마주칩니다. 깜짝 놀라 다시 바늘을 보니, 바늘이 바로 저를 향하고 있습니다. <무의미의 축제>는 바로 그런 무게를 지닌 소설이었습니다. 저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