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학대식 Mar 03. 2020

인간 본성의 법칙

사람을 알아가는 조금 더 확실한 방법

[글자]라는 '인간들의 약속' 덕분에 우리는 타인과 [대화]를 하며 살아간다. 물론 이 [대화]라는 단어의 범위와 의미, 그리고 이것의 중요성은 개개인이 처한 상황마다 또 문화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적어도 이 인간의 상호작용이 우리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 싶다. 인류는 모두 각자의 모습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 살아왔지만 각기 다른 모습의 그들의 삶에서 '대화가 없는 시간'을 발라내는 것은 누구에게도 쉽지가 않을 만큼 대화는 인간의 생활에 필수요소인 것이다. 


게다가 본인에게는 '대화'가 없는 인간의 삶은 [삶의 중단]과 그 의미를 같이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대화가 없는 삶이란 소통의 부재를 의미하고, 소통 없는 본인의 시간은 흡사 호흡의 부재가 아닐까 싶다. 본인의 생각이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닌지,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것에 동감하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나 어쨌든 우리 모두는 대화가 없는 삶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에 이것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다. 늘 옆에 있던 당연한 무엇을 갑자기 없는 것으로 가정하는 일은 어느 누구에게도 쉽지 않으리라.


혼자서는 제대로 된 대처가 불가능할 만큼 복잡하고 속도가 빠른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라는 연약한 존재가 생존을 위해 선택한 수단, 수많은 생존의 방법 중 가장 현명하고 객관적인 방법은 누가 뭐래도 [글자] 임이 분명하다. 이 [글자]라는 약속이 있기에 우리는 혼돈이 덜 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여러 가지 형태의 [문자]가 존재하기에 각각의 표기법은 다르지만 우리는 이 약속을 통해 같은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하나의 내용을 그들의 언어와 같은 의미로 치환할 수 있는,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같이 공감할 수 있는 기준을 가졌다는 점에서 [글자]라는 것은 역사 이래 인간이 약속을 맺고 사용하는 가장 크고 단단하며 객관적인 사회적 계약이라 말해도 큰 무리가 없지 싶다.


[글자]를 통해 나의 뜻과 생각을 타인과 나누는 일은 기실 우리 모두의 삶에 너무나 기본적이다. 한 번도 이것이 없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 없었을 때를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이렇게 글자를 통한 의미의 소통을 당연시하는 문화에 살고 있는 본인에게 큰 울림을 주는 책을 얼마 전 만나게 되었다. 사실 그런 기대를 하지 않고 빌리게 된 책이라 더욱 그 잔향이 남는지도 모르겠다. 


책에서는 인간이 타인과 관계 시에 모름지기 알아차려야만 할 비언어적 소통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특히나 인간에게 오래전부터 내재되어있는 생존 의지가 발현되는 행동적 특징에 주목한다. [글자]와 [언어]라는 약속이 있기 훨씬 전부터 인간은 자신의 뜻을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기에 이 결과들은 오롯이 인간의 진화 안에 퇴적되어, 글자라는 약속을 가지고 사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들 안에 존재하며 우리의 인식과는 별개로 언제든 발현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뜻을 알리는 일련의 과정들은 그 옛날, 생존에 직면한 문제였기에 어느 누구에게나 급박하고 절박한 것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불이 뜨거우니 만지지 말라는 경험을 전달하고자, 저 숲 너머에 호랑이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정보를 전달하고자, 내가 여기가 아프니 이곳을 살펴봐달라는 간절한 바람을 전달하고자 하는 인간이 얼마나 절박했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가능하다. 이런 인간의 절박했던 삶에서 글자와 언어가 없는 환경을 가정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자가 없는 세상 속에서 생존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는 인간의 필사적인 몸부림은 아무리 세상이 변하였어도 우리의 뇌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살아간다. 오직 상대방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그들의 생각을 글로 적은 문장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판단할 따름이다. 엄청나게 두꺼운 책에서 작가가 하는 말은 단 한 가지, "본능적으로 나오는 비 언어적인 표현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자주 나타나는 이 비언어적인 표현의 예를 열거하며 독자들의 동의를 구한다.

'[말]과 [글]은 조작이 가능하지만 이 비언어적인 표현은 조작이 불가능하기에 이것을 잘 알아차리는 것이 사람을 잘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라는 그의 논점은 사람을 판단하는데 언어에 매우 큰 비중을 두는 본인에게 큰 충격이었다. 본인은 흔히 말하는 [글쟁이]도 아니고 '글 쓰는 일에 큰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한 가지 분명한 확신 같은 것이 있다. 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하는 것과 글을 논리 있게 적어내지 못하는 것, 적어도 둘 중 하나를 평균으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인간적으로 그다지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평소 의심이 많은 인간인지라 새로운 누군가와 친해지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본인과 같이 사회성이 결여된 인간에게도 지난 세월의 기억에서 지우고픈 인연들이 있기 마련이다. 기억의 삭제는 마음먹은 대로 쉽지 않았지만 실수의 재발은 막아보고자 인연을 만드는 것에 나름의 기준을 고민하던 중 가장 객관적인 판단의 지표를 발견한 것이 [글자]였다. 특히나 그들의 '말' 보다는 '글' 통해 판단하는 방법이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다. 이런 본인의 생각이 잘못된 것 일 수 있음을 시사하는 작가의 이야기에 머리가 하얘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엄청난 두께의 책 속에서 작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일화들을 접하며 가슴 한편에 이 엄청난 두께가 과연 필요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논리가 허무하다거나 본인에게 별다른 동감이 되지 않는다 라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간의 행실을 돌아보고 조금 더 나은 시선으로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는 노력이 요구되는 도전을 얻었다. 타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남의 탓으로 여기기보다는 본인을 포함한 인간 모두에게 잠재된, 단지 개개인의 환경과 문화의 차이로 인한 정도의 차이를 가질 뿐이라는 인간 전부에의 폭넓은 이해의 요청은 그저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현자들의 허황된 말이 아니었음을 동감한다.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어느샌가 익숙한 무엇을 바꾸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이 힘들어지는 나이가 되었다. 이뤄 놓은 것이 없어 잃을 것도 없지만 도전과 학습을 꺼리는 늙은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본인의 머릿속에 오래간만에 전혀 새로운 바람이 들어왔다. 새로운 도전을 마음먹을 그런 신선한 바람이라 특히나 기분이 좋다. 귀를 간지럽히는 달콤한 언어, 그 이면에 있는 진심을 알아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는 불혹에 한 번쯤은 시도해 볼만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브런치라는 서비스 이용자들에게는 본인과 마찬가지의 충격과 지금과는 다른 생각의 꼭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이 글을 읽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읽는 것이 좋고 쓰는 것으로 생각을 나누는데 익숙한 이들이기에, 그리고 이 브런치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동감하는 사람들이기에, 더불어 말과 글의 소중함과 그 힘을 믿는 사람들이기에 그렇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엄청난 두께에 겁먹을 필요가 없다.   


     






  

작가의 이전글 40대에 만나게 된 취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