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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과의사 호빵맨 Aug 31. 2018

인턴 선생님에게

두려워하는 건 괜찮다. 그건 어쩔 수 없으니까. 하지만 겁을 집어먹지는 마라. 

숲에 사는 어떤 것도 네게서 겁쟁이 냄새만 맡지 않으면 너를 해치려 들지 않을 거야.”

-. 윌리엄 포크너 『곰』


 인턴 선생님 안녕하세요. 어려운 시간을 통과하여 면허를 따고 드디어 의사가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의사고시도 이제 먼 시절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고, 진로에 대해 불투명하던 상황도 인턴이라는 ‘어정쩡하고 신뢰 불가한 의사’가 된 것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도 무척 힘드셨겠지만, 고생 끝에 다시 고생길이 훤하게 열려있습니다. 병원에서 인턴은 그냥 투명인간입니다. 불행하게도 영화 속 투명인간처럼 벽을 뚫는다거나 하는 초능력은 없습니다. 아무도 그 존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누구도 여러분의 영웅적인 업적을 바라지 않습니다. 출퇴근과 통행과 당직의 의무를 다하는 무색무취한 공기 같은 존재이지요. 


 여러분은 의과대학 학생 시절, 교수 바로 밑에서 재벌 2세 정도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학교를 마친 진짜 재벌 2세였다면, 부장, 차장, 상무 등으로 승진을 했을 테지만, 여러분의 특혜 시절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면허를 가진 인턴이 됐는데, 병원 서열 중 가장 밑바닥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어제까지 다정다감하던 교수들은 말 한마디 걸어주지 않습니다. 급전직하란 바로 이런 상황을 이르던 말이던가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돈의 흐름과 연관 지어서 설명을 하기도 하는데, 돈 내고 학교 다니는 사람과,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의 대접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루아침에 불가촉천민신분이 되었다는 것에 당황스러운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못나서가 아니고, 본격 사회생활이 시작되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회사는 도서관에서 만나던 선배들이 대개 직장 상사로 있으니 비교적 편한 관계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겪어봐야 그 진면목을 알게 되죠.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이 인도에 맨홀 뚜껑만큼이나 많습니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일로 만나면 참 괴팍하게 변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군대나 휴직 등으로 경력단절이 있어서 조금은 알던 친구나 후배 밑에서 일을 해야 된다면, 편하게 일할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신분이 다르니 반말하기도 애매하고, 뭘 물어보기도 어색할 겁니다. 가끔은 배신감도 느낄 것입니다. 이런 사이보다는 아예 모르는 사람이 되려 낫습니다. 


 그래도 무엇보다 기쁜 건 지긋지긋한 시험을 당분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암기와 그 많은 시험은 왜 필요했을까 하는 회의가 밀려올지도 모릅니다. 머리를 꽉 채웠던 실제로는 쓸데가 없는 과중한 지식 덕분에 꼭 필요한 지식이 도대체 떠오르지 않습니다. 검색과 연산 기능을 끈 상태로 본능과 눈치에 의지한 병원 생활이 더 편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통장으로 들어오는 급여도 업무능력에 비해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몇 달 지나면 온 세상의 직장인들의 마음처럼, 월급이 턱없이 작다고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의 투명인간 생활은 한 달 주기로 새로 시작됩니다. 동가숙 서가식[東家宿西家食]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겠지요?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들어오신 분들은  한문에 약한 것으로 압니다. 저는 한국에서만 공부해서 영어가 약한데, 스펙이 좋다고 칭송받는 분들에게 이런 말로 어리둥절하게 하는 재미가 꽤 있습니다. 이런 필요악 인턴 수련을 없애고자 본과 4학년 학생 실습을 인턴처럼 실용적으로 시키자는 원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아니 있어왔습니다. 제가 인턴을 할 때도 이런 말은 있었습니다. 아마 이 계획은 지구가 멈추는 날까지 실현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구에는 말똥구리처럼 허드렛일을 해주는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병원에서는 바로 여러분이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대략 아시는 것처럼 인턴은 1년이고, 레지던트(resident)는 대개 4년입니다. 레지던트가 끝날 무렵 전문의 시험을 봐서 합격하면 OO과 전문의가 됩니다. 그 후엔 미국 시민권이 없고, 허리디스크도 없고, 귀신이 보이지도 않고, 용빼는 재주가 없다면 군대에 갔다 와야 합니다. 물론 여자분들은 굳이 원하지 않는다면 해당이 없습니다. 돌아와서는 취직자리를 알아보거나 더 상식 밖의 공부가 하고 싶다면 펠로우(fellow)라는 분과 전문의 과정을 몇 년간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턴 과정은 미래에 어떤 의사가 되겠는가 하는 밑그림을 그리는 시간으로 보내시면 됩니다. 진료과와 병원을 돌면서 각 과의 장점과 단점, 의국 분위기 등을 파악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인턴에게 불친절한 과는 지원자가 넘치는 인기가 많은 과일 것입니다. 전공의 지원자 모집에 혈안이 돼있는 과는 외과 같은 비인기과인데, 장발장에게 미리엄 신부가 그랬듯 여러분을 매우 따뜻하게 대해줄 것입니다. 


 인턴의 일은 초면인 사람한테 숙달되지 못한 상태로 고통을 주는 일입니다. 기쁨 주고 사랑받는 사람이 돼어야 하는데, 고통 주고 욕을 먹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혈액종양내과 인턴 시절, 주사기와 채혈로 하루를 보내고 피폐한 몰골로 퇴근하던 저녁이 떠오릅니다. 미용실에 들렀는데, 제 머리를 기분 좋게 가위로 잘라주던 미용사를 한참 동안 부럽게 쳐다봤습니다. 미용사의 일이 내 일과는 정반대로 기쁨 주고 사랑받는 일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세상에는 미용사처럼 좋은 직업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이미 가졌는데, 스스로는 불행함을 느끼는 시절이었습니다.  

 

 어렵겠지만, 주변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힘, 돈, 권력이 없어도 행복하게 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사람한테 사랑받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성실해야 합니다. 밝은 표정을 유지하는 것도 좋습니다. 밝은 인상, 따뜻한 말은 오고 갈수록 정이라는 마일리지로 쌓입니다. 물정 모르고 만나는 환자들에게도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환자 파악이 잘 돼있는 인턴처럼 똑똑해 보이는 사람도 없습니다. 꼭 필요한 오더를 수행하고 있는지, 환자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의심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더가 이상할 때는 오더를 내린 전공의에게 꼭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자존감이 떨어질 때는 가운의 명찰에 적힌 선생님의 직함을 천천히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응석받이 학생이 아니고 엄연히 면허를 가진 전문가입니다. 여러분의 무운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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