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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과의사 호빵맨 Aug 12. 2018

회의와 회의감

“어떤 의견에 대해서든 철저하게 부정하고 논박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갖게 된다면, 

우리의 의견이나 그에 따른 행동은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병원에도 회의가 참 많다. 때가 되면 본업인 진료를 시작해야 하므로, 오전 회의는 주로 아침 7시에 시작된다. 얼마 전 점심 회의에 들어가서는 이게 대체 몇 번째 회의인가 세어 봤더니, 고작 4번째 회의였던 날도 있었다. 저녁에는 병원 밖에서 회의가 준비된다. 학회 모임이나, 외부 기관과의 연구모임 등등, 어떤 날은 회의로 시작해서 회의로 끝나기도 한다. 


 공리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은 회의를 많이 안 해본 분이었던 것 같다. 회의는 일반 참여자들의 의견과 이견이 전혀 없어야 성공이다. 상급자가 여한이 없게 말을 할 수 있었거나, 드러내지 않았던 마음속의 결론이 나오면 대성공이다. 일반 참여자들은 이런 성공적 회의 개최에 익숙해질수록 '회의감'이 든다는 성숙한 표현을 한다. 학생은 겨우 전주만 연주했는데, 교수가 입 하나로 피처링 랩을 쏟아내는 회의를 '랩미팅'이라고 한다. 실무를 모르는 상급자가 없어 실현 가능한 현실적인 결론이 나왔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현이 되지 못해 무의미할 회의'를 '실무회의'라고 부른다. 반대로, 갑자기 연락받고 억지로 끌려와서는 서로를 북돋우며 성공적인 회의를 위해 거수기 역할을 하면서도, '우리는 원해서 회의에 왔다'는 자위의 뜻으로 '위원회'라는 회의가 있다. '간담회'는 평소 간과 담낭을 빼놓고 다니는 사람들의 애사심과 충성심을 슬쩍 떠보려는 자리인데, 애로사항을 술술 얘기하는 진솔한 사람들도 있다. 이런 곳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은 회사의 상급자들과 다른 회사의 상급자들끼리 하는 원격회의를 비하해서 '화상(들)회의'라는 심한 말도 쓴다.  


 다른 생각들이 존중돼야 한다지만,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은 사실 불편하기 짝이 없다. 생각이 같은 사람이 많으면 더 편해지니까, 설득을 해보려고 현란한 말과 그림들로 시간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머리 굳은 어른들 아니 어린이들도 자기 생각을 여간해선 잘 바꾸려 하지 않는다. 내 생각이 드러나면, 그것도 혹시 다르다면, 저 사람이 불편해할까 봐 손뼉을 치거나 침묵을 선택한다. 말로는 동의해도 마음을 바꾸는 일은 어렵다. 


 소소한 회의로 성이 안 차는 회의 중독자들이 만든 몰입적 회의를 ‘워크숍(workshop)’이라고 부른다. ‘수련회’라는 표현도 있지만, 이 말은 모네의 그림 연작을 잘못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부작용이 있다. 모름지기 ‘워크숍’이라는 외래어를 써야,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업무의 연장선에 있는 행사로 인식된다. 가족들에게 말하기도 좋다. 국립국어원이 정한 외래어 표기법에 의하면 ‘워크샵’, ‘워크샾’은 모두 틀렸고, ‘워크숍’이 맞는 표현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해설은 다음과 같다. Orange를 ‘어륀지’라고 쓰지 않고 ‘오렌지’라고 쓰는 이유다.  


“외래어 표기법은 해당 외국어의 발음을 원음에 가깝게 한글로 표기해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한 방식으로 외국어, 외래어를 최대한 일관되게 표기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받침에는  'ㄱ,ㄴ,ㄹ,ㅁ,ㅂ,ㅅ,ㅇ' 만을 씁니다.”


 워크숍은 대체로 유원지나 연수원의 강당이나 회의실에서 열리며, 행사의 취지가 끝장 토론이므로 취지에 맞게 밤샘 음주로 이어진다. 워크숍의 수많은 장점 중 몇 가지를 추려보자. 앞에 앉는 상위 20% 참여자는 그제야 비로소 정확하게 문제를 인식하고, 활발하게 토론을 이어가며, 조직 내 열띤 소통의 기쁨으로 마이크를 놓지 못한다. 하위 80%는 약속이나 한 듯 우선 고개를 숙이고, 급조된 자료집에 필기구로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다. 자신도 잊고 있었던 시, 서, 화의 재능에 깜짝 놀라게 되는 순간도 있다. 가끔 고개를 들어서는 열렬한 경청을 하는 척하다가, 회의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영역으로까지 사고가 확장되면서 창의력 향상의 기쁨을 덤으로 맛본다. 


 워크숍의 하이라이트는 초청 연자의 특강이다. 푼돈으로 섭외할 수 없는 거물급 인사지만, 회사 고위직과의 인연으로 어렵게 모셨다고 소개된다. 그런 이유로 워크숍 취지와는 아무 상관없는 분들이 와서는 또 거의 상관없는 주제로 말씀을 한다. 유명 연자의 특징은 어떤 청중, 어떤 장소에서도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중의 반응이 있건 없건, 깨알 같은 자기 자랑을 빼놓지 않고 할 얘기를 다 한다. 연단을 기준으로 바로 앞, 청중 기준으로는 왼쪽 앞쪽이 주로 고위직들이 앉아 있는 곳인데, 이분들은 산전수전을 다 겪어 감정 기복이 잘 표현되지 않는 분들이다. 프로들은 이분들 앞에서는 편하게 떠들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경직된 분위기와 마주한 연단에 머무르지 않고, 무대를 왔다 갔다 하면서 반응이 좋은 청중을 어떻게든 찾아내서 긍정적 피드백을 얻어내고야 만다.     

 

 몇 년 전 참여한 워크숍에서는 ‘협상과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6시간 정도 교육을 받았다. 그날도 어김없이 강의에 흠뻑 빠져든 나는, 내 직업이 대테러반 특공 경찰이거나 외교관인 줄로 착각하고야 말았다. 그때 받은 예술적 감화를 시, 서, 화 연작으로 자료집을 빼곡히 채워나가 보니, 안견의 [몽유도원도] 수준까지 갔었던 것 같다. 협상법은 약한 자를 질리게 하여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최고의 전략임을 강의 내용과 무관하게 스스로 터득했다.


 ‘분임토의’는 하위 80%도 ‘중요한 분임’이라는 취지로, 마련해주는 조별과제 시간이다. 평소에 잘 모르던 분들과 한 곳에 모여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회사의 문제와 앞으로의 발전 방향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고민해야 한다. 내 문제와 발전 방향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끼리 말이다. 분임토의는 조장이 정해져 있다. 조별로 파견된 ‘지도원 동무’다. 이 동무의 지도를  시작으로 자유토론을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자유롭게 하면 된다. 조에는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말이 되게 내용을 정리하는 정리자가 있고, 이것으로 슬라이드를 만들어 강당에서 발표하는 발표자도 필요하다. 이 숭고하고 귀찮은 일을 떠맡지 않으려면 초반에 조장이나 조원들에게 눈에 띄지 않게 수줍은 표정으로 있거나, 아예 옷에 커피를 쏟아서라도 자기 관리도 미숙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좋다. 그럴싸해진 결과물을 조장이 발표하면 되지만, 조장은 ‘어느 구름에서 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말을 떠올린다. 고위직으로부터 지적받을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조장은 발표를 피하는 경향이 있다. 발표자가 발표를 너무 잘하면 그 문제에 대한 장기 해결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맡을 가능성도 있다. 숙제 잘해가면 경시대회 내보내는 격이다. 회사가 원하는 ‘주인정신’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가 눈 앞에 펼쳐진다. 아는 사람들은 안다. 회사 분위기 망치지 않는 적당한 선을 아는 사람만이 호봉이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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