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원래 살던 집에서 한 달의 여유를 두고 우리는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이사 갈 집의 보수 공사가 만만치 않았는데, 어차피 남편과 나 둘이서 해야 할 일이라 성급하게 마음먹지 않기로 했다. 오래된 집이라 손 볼 곳이 많았지만, 우선 5미터가 넘는 삼각 지붕의 천장과 벽면 전체 페인트칠, 20년이 넘은 부엌 철거, 차가운 타일 바닥 위에 마루 깔기 등의 일부터 하기로 했다. 이런 일을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우리가 이걸 다 직접 한다고? 그렇다. 인건비가 비싼 프랑스에서 직접 집을 뜯어고치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다. 온갖 공구와 집을 고치는데 필요한 재료를 판매하는 거대한 상점을 파리 외곽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그 이유이다. 사람들은 자가용과 작은 트럭을 빌려 싱크대나 마루, 마루 원목을 자르기 위한 원형절단기 같은 것들을 사서 차에 싣고 간다. "저걸 사서 뭘 어쩌겠다는 걸까?" 했던 과거의 생각이 이제는 내 현실의 일이 되어 발등에 떨어진 것이다.
설령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사람을 쓴다고 해도 약속 시간 제대로 안 지켜, 그러다 보니 공사 기간 늘어나, 비가 와서 일 못 해 등의 사유들로 골머리를 앓는 집주인을 여럿 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래, 너희들이 직접 하는 게 나아!" 하고 입을 모아 말했다.
경험이 없으니 무엇이든 호기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집을 구입했다는 기쁨에 취해 있을 때였으니까.
거실의 높다란 창을 열면 빛바랜 초록과 노랑의 목련나무 이파리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맞은편 *메종의 정원에는 사계절 내내 둥글고 키 높은 나무가 있었는데 나는 그 나무를 무척 좋아했다. 거대한 나무가 저 멀리 *시테의 닭장 같은 아파트를 가려주기 때문이었다. 해가 나면 모든 것들에 빛이 나는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해가 나기 때문에 더욱 흉해 보이는 게 있다면 바로 저 시테의 아파트들일 것이다. 흐리고 비가 추적추적 내릴 땐 시테의 고층 아파트도 날씨에 묻혀 그럭저럭 봐줄 수 있었다. 그 아파트들은 보통 회색톤을 띠고 여러 채가 함께 있어 마치 영화 베트맨의 고담시티를 연상케 했다. 나는 앞 집 주인이 혹시나 키 큰 나무를 베어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창문을 열 때마다 전전긍긍했다.
들리는 건 오직 새들의 지저귐과 바람에 나무 이파리들이 스치는 소리뿐이어서 마치 아주 먼 시골로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집 주변에는 온통 늦가을의 정서로 충만했다.
주말 동안은 이사 갈 집의 공사를 하고, 평일엔 출근을 위해 파리로 돌아왔다. *RER을 타고 25분이면 파리 오스텔리츠 역에 도착했는데,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파리가 더욱 싫었다. 길바닥은 어찌나 더러운지, 냄새는 또 어떻고!
다시 돌아온 주말, 커다란 가방에 필요한 것들을 주섬주섬 챙겨 이사 갈 집으로 가려고 나서는데 집 앞 4차선 대로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아, 오늘이 *질레존(Gilets jaunes) 시위하는 날이구나. 마크롱의 유류세 인상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시작한 시위가 어느새 일 년 가까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위는 마크롱의 친기업 정책과 부유세 인하, 공무원 개혁 등의 이슈와 맞물려 더 격화되는 양상이었다.
아파트 대문을 나서니 열을 맞춘 무장 경찰들이 내 코 앞에서 최루탄 쏠 준비를 했다. 순식간에 인파에 떠밀려 나는 집과 멀어졌다. 무장 경찰 하나가 다시 집 방향으로 가려는 나를 제지했다.
"내 집이 바로 저기에 있다고요!"
불같이 성질을 내니 얼른 가라고 비켜주었다. 집에 돌아와 창 밖을 내려다보니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자 사람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들었다. 검은 마스크를 쓴 남자들이 우리 아파트의 쓰레기통을 대로 한가운데로 가져가 불을 붙였다. 불은 검은 연기를 내며 활활 타올랐다. 소방서에 신고할까 했지만 이내 생각을 거두었다. 파리가 온통 이 난리통일 텐데 신고한다고 해도 누가 죽어가는 것 아닌 이상에야 올 것 같지가 않았다. 무장한 경찰들은 봉을 들고 사람들을 위협했다. 그러다 무고한 시위자를 경찰봉으로 때리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영상으로 담아 프랑스 BFM에 제보했다. 이사 갈 집에서 공사를 하고 있던 남편은 나와 통화를 하다가 어서 커튼을 치고, 사진 찍는 걸 조심하라며 창가에서 물러나라고 말했다. 눈앞에서 불은 활활 타오르지, 사람들의 분노와 경찰의 폭력, 매캐한 냄새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음 날 집 근처 은행은 모조리 박살이 났고, 자동차 수십 대가 불에 탄 것은 물론이며, 아스팔트 바닥을 깨서 던지는 용도로 쓰는 바람에 동네는 마치 전쟁이 지나가고 난 듯한 몰골이었다. 이 정도로 큰 시위가 일 년 동안 몇 번이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마음으로는 너무도 질레존 시위를 응원했지만 사실은 피로하기도 했다. 시위를 할 때마다 시위대가 지나다니는 길의 지하철을 막는 통에 40여 분을 걸어서 퇴근한 적도 있기 때문이다. 내 직장은 바스티유 광장과 레퓌블리크 광장 사이에 있는데, 이 두 광장은 수많은 시위들로 유명한 곳이었다.
집에서만큼은 조용히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너무 지친다. 어서 파리를 떠나자.
*메종(Maison): 단독 주택
*시테(Cité): 도시, 주택단지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으나 저가 임대 아파트 혹은 게토라는 뜻을 공유한다.
*RER: 수도권 고속 전철
*질레존(Mouvement des gilets jaunes): 노란 조끼 운동
*BFM: 프랑스 TV 채널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