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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정연주 Dec 08. 2022

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하루를 상상해본다*는 이랑

한국어문기자협회지 말과 글 <나니아 옷장 속 대중가요사> 2022겨울호

 (* 가수 이랑의 노래 제목에서 따옴.)


   가수 이랑을 알게 된 것은 그가 몇 해 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보인 행동 때문이었다. 돈과 명예와 재미, 이 셋 가운데 둘 이상이 충족되지 않는 일은 하지 말자던 친구의 말을 따르겠다며, 수상자로서 받은 트로피를 현장에서 입찰에 부쳐 현금을 챙겨 시상 무대를 떠나던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가난한 음악인으로서 상금 없는 시상식에서 ‘올해의 포크 노래 상’을 수상했던 장면이었다.

2017년 가수 이랑은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수상 직후 트로피를 입찰에 부쳤다. (사진출처: 네이버 이미지)

행적이 궁금해 그때부터 조용히 그에게 귀를 기울였고, 그의 글도 챙겨 읽었다. 그가 지난해에 발표한 이솝우화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의 음반을 들으면서 한 예술가의 성장을 주목했다. 그가 노래로 보여주는 이야기에 나의 세계 또한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가수 이랑의 3집 앨범 <늑대가 나타났다>

이랑은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발표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의미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그 무엇도 의미 없게 느껴지기도 해서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던 그는, 이제, 아직 세상에 꺼내지지 않은 다양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힘든 것은 힘들다고 얘기하면서 같이 살아가자고 노래로 말을 걸고 있단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음반의 제목이 <늑대가 나타났다>였다.


가수 이랑은 이 음반에 대해, 자신과 주변 인물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기록했지만 자신의 삶이 결국 여러 사회 문제 속에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라 설명했다. 그는 낯선 그의 음악을 가리켜 ‘민중가요’라 칭했다.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난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민중가요’란 단어가 어색했다.


민중’을 살펴본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국민. 피지배 계급으로서의 일반 대중을 이른다.” 고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가수 이랑이 말하는 ‘민중가요’는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국민을 위한 가요’, ‘피지배 계급으로서의 일반 대중을 위한 가요’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에 대해 현재 우리는 ‘민중가요’라 하지 않는다. ‘대중가요’라 칭한다. ‘민중’ 또한 잘 쓰지 않는다. 구호에서나 볼 수 있을지언정 일상적으로 듣기 힘든 말이 되었다.      


文化質疑

民衆藝術이란 무엇이며 누가 처음 主張한 것입니까

藝術이란 것이 一部 特殊階級의 사람들이 즐기는 것이 되있서는 안되겠다는 것은 이제 세삼스럽게 말할 必要가 없는 일로서 一般民衆도 그것을 즐기고 그 自身藝術을 가져야 되고 그것을 感賞해야 되는 것이 當然하다고 主張하여 佛蘭西|.|民衆劇場이라는 것을 力說하였습니다 이것이 民衆藝術이란 말의 嚆矢인데 藝術大衆化等 으로 民衆藝術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常識化問題입니다.

경향신문 1949.03.04     



지금으로 치면 포털의 <지식인> 역할을 했던 경향신문의 <문화질의>라는 구성에서 발견한 내용이다. ‘민중예술’을 궁금해하는 독자에게 친절하게 답하고 있다. 예술이 일부 특수한 계급만의 것이 아닌 ‘일반민중’도 예술을 즐기고 그 자신의 예술을 갖고 감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을 펼친 프랑스의 ‘로망 로랑’(Romain Rolland, 로맹 롤랑)에 의해 ‘민중예술’이란 말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덧붙여 예술의 ‘대중화’로 ‘민중예술’은 ‘상식’이 된 문제라고도 설명한다.

궁금해졌다. ‘민중’과 ‘대중’, 이를 사용한 ‘민중가요’와 ‘대중가요’의 구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답을 찾기 위해 ‘민중’과 ‘대중’이란 말의 쓰임을 시대별로 대략 살펴보았다.

앞선 1949년 기사의 설명에서도 볼 수 있듯, ‘대중’과 ‘민중’은 당시에도 구별해 쓰고 있기는 하다. “예술의 ‘대중화’로 ‘민중’예술은 상식이 된 문제”라 설명하는 데 있어, ‘대중화’는 말 그대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사람’을 뜻하는 ‘대중’에 변할 화(化)를 붙여 쓴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민중예술’은, ‘특수한 계급’과 비교하며, ‘일반 민중도 즐기는 예술’이라는 것을 강조해 ‘민중’이란 말을 활용해 설명한다. ‘대중’은 ‘민중’에 비해 더 넓은 개념을 가진 단어로, ‘민중’은 계급의식을 반영한 단어로 쓰고 있다. 현재의 쓰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위의 쓰임과 달리 ‘예술’과 굳이 결부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구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좀 더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22년 동아일보 1월 19일 자에 실린, 월간잡지<신생활> 발행과 관련한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다.

人間社會沙場인가 花園인가 政治, 法律, 道德, 宗敎하나 그러하나 大衆에게는 自由平等하도다.”  

‘대중’에게는 자유와 평등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대중’ 대신 ‘민중’과 바꾸어도 무방할 정도의 느낌이다.

1931년 새해 첫 날, 동아일보에서 다룬 ‘쌀값 폭락에 따른 농촌 각지의 실정’을 다룬 기사에서도 “조선의 대중인 소작인들은 굶어야 할 형편”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에서의 ‘대중’ 역시, ‘민중’과 같은 느낌으로 사용되었다.

1945년 11월 24일 조선일보의 속간에 대한 당시 인민당 여운형 선생의 글을 보자.    

  


大衆의 참다운 벗

過去의 우리 民族文化 육성에 막대한 貢獻을 하여온 朝鮮日報가 이번 續刊케되였다는 말을 듯고 여간반가웁게 생각지안는다 그러치안어도 하로바삐 續刊됨을 기대하고 잇든터라 忠心으로 慶賀하여마지안는다

要望이라면 내내 勤勞大衆의참다운벗이되며 도음이되는 일반民衆을 위한 新聞이되여주기만바란다                                    

-하 략     


간행이 중단되었던 조선일보가 독립을 맞아 다시금 돌아오게 된 것을 축하하며 “조선일보가 ‘근로대중’의 참다운 벗이 되며 도움이 되는 ‘일반민중’을 위한 신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글이었다. 당시 혼란했던 정치 상황에서 극좌와 극우 정치인들 사이에 있던 몽양 선생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건 없건 글 속에 쓰인 ‘근로대중’이나 ‘일반민중’이란 말에서 크게 느껴지는 위화감은 없다.

     이후의 신문 기사들에서도 ‘민중’과 ‘대중’에 주목해 키워드검색을 해본 결과, 1953년 한국전쟁 이후에도 ‘민중’을 일반적으로 ‘대중’과 혼용하고 있었다. 경찰을 가리켜 “민중의 공복”이란 표현을 쓰는가 하면, “민중처우”, “민중조직망”, “관리급일반민중”등의 표현이 쓰이고, “민중의 정서 생활”, “서민대중”, “도탄에서 신음하는 대중”, “노동자대중”, “국민대중”,“노농대중”,“일반대중”,“대중의식” 과 같은 표현도 많다. 이런 쓰임은 1960년대까지도 지속된 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는 조금씩 ‘민중’이란 말이 기사에서 적게 검색된다. 1967년을 기점으로 ‘민중’은 ‘대중’과 비교해 많이 쓰이지 않는다. 그러던 것이 1985년에 급격히 사용 빈도가 높아지고 1989년에 정점을 찍고 난 이후 다시 그 활용이 줄어든다.

이에 비해 ‘대중’은 꾸준히 사용 빈도가 높아지는 경향을 보이며, 1996년의 경우 ‘민중’에 비해 대략 세 배 정도 많이 검색된다. 과거 서로 혼용되어 쓰이던 ‘민중’과 ‘대중’이란 말의 언어적 ‘줄다리기’에서 ‘대중’이 승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말에 담긴 ‘계급의식’에 주목해 두 단어를 좀 더 세분화해 활용했던 것으로도 해석한다.

나아가 민중가요를 짚어본다. 우리 가요사에서 대중가요와는 확연히 다른 자리매김을 한 영역이다. ‘민중가요’란 말은 우리 역사에서 의의로(혹은 예상대로) 비교적 늦게 쓰이기 시작한 말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야 ‘민중’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현실참여 예술운동이 활발할 수 있었기 때문일 듯하다. 이후에도 ‘민중가요’는 ‘저항가요’ 또는 ‘운동권 가요’와 같이 혼용해 쓰는 말이 된다. 1988년 당시 <노래를 찾는 사람들> 대표였던 이경호씨가 한겨레 신문과 나눈 인터뷰 내용을 보면, 삶에 뿌리내린 대중가요를 만들고 싶다며, ‘운동권’ 노래에 대한 반성을 통해 대중성을 얻고, 공연을 통해 참다운 ‘민중가요’를 위한 전기를 삼고 싶다고 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민중가요는 ‘삶에 뿌리내린 대중가요’라고도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수 이랑은, 34년 전 한 선배가 내린 정의에 비춰 보아도, ‘민중가요’를 하는 사람이다. 그는 ‘환란의 세대’라 칭한 사람들의 삶을 궁금해하며 노래로 안부를 묻고,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같이 아파하자고 작게 웅얼거린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여러 사람과 더 많이 얘기하고 싶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는지 자꾸 찾게 되고, 다 같이 신나게 외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그가 지난 2022년 10월 16일에 오르기로 했던 무대에서 갑자기 제외되었단다. 1979년 독재 정권에 맞서 민중들이 목소리를 높였던 것을 기리기 위한 국가행사에서였다. 몇 달 전부터 약속됐던 무대를 기념식 3주 전에 돌연 빼앗긴 그는, “VIP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을 우선 목적으로 삼는” 국가 기관의 처사를 언론을 통해 전했다. 그의 노래, <늑대가 나타났다>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도시 성문 안쪽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외치는 절규에 대해, 늑대가 나타났다고, 마녀가 나타났다고, 폭도가 나타났다고, 이단이 나타났다고 호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노래가 <늑대가 나타났다>이다. 부마 민주항쟁 기념식이야말로, 이른바 ‘매우 중요한 자’가 그런 노래에 귀를 더 기울이고, 불편해하고, 그를 통해 마음과 시선을 움직여 성문 바깥을 들여다보게 해야 그 의미가 있다.

성문 바깥에 서 있는 것 같은 민중으로서, 대중으로서, 그리고 다행히 생존해있는 한 국민으로서 몹시 심기가 불편하고 슬픈 마음으로 2022년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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