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기 쉬운 마음을 갖고 살아가던 내게 사회적 나이테가 더해지던 어느 날, 말 그대로 새하얀 빛으로 나를 비춰주던 아이가 나타났어. 내 마음을 그저 스윽 흝고 지나가나 했는데 웬걸, 그 빛은 내게 더 강렬하게 쏟아졌어. 나는 눈이 부셔 손사래를 치거나 눈을 꽉 감아 버리기도 했어. 결국 뒤돌아 그 빛을 외면했지. 그 아이의 새하얀 빛에 비해 나의 빛은 이미 너무 다양한 빛깔 속에 감춰져야만 했거든.
그러다 밤이 찾아왔어. 온통 깜깜했지. 저 멀리 작은 별빛에나 의지해 길을 가야 하나 싶던 어느 날, 등 뒤에서 빛줄기가 느껴졌어. 응, 그 애였어. 놀랐지만 반가웠고, 달랠 길 없는 외로운 마음을 꺼내 보일 수 있어 기뻤어. 어느새 난 가던 길을 멈추고 자라나는 내 마음을 꺽지 않고 고스란히 그 애에게 전하게 됐어. 그 애는 미련을 남길 바에야 언젠가 그리워 아파하자고 하더라. 그 말에 한껏 용기를 내 서둘러 안겨본 그 품은 따뜻했고 거기 머물고 깊은 마음도 생겨났어. 그렇게 우리는 둘만의 비밀을 새기고 추억할 날들을 같이 걸었어.
그러다 또 다른 밤이 찾아왔어. 서로를 비추던 불빛이 여전히 하얗게 빛나던 그 밤, 문득 난, 피고 지는 마음을 헤아려야 했던 지난 나의 계절들을 떠올렸어. 상대를 환히 비출수록 짙어지던 나의 그림자를 떠올렸고 그로 인해 출렁이던 마음의 파고에 매달려 견뎌야 했던 날들이 생각났어. 활짝 피었던 만큼 '뚝' 하고 지고 말 동백꽃을 그의 붉은 입술에서 본 것도 같아. 겁이 났어. 나는 서둘러 돌아섰고, 창백해진 그 사람의 불빛에 그림자로 내 마음을 그려 전했어. 그렇게 난 심호흡 없이는 펼쳐보지 못할 그와 나의 이야기 책을 덮었어.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가 다시금 그 책을 집어 들게 하더라. 울컥함과 일렁임으로 가슴께에 묘한 파문을 일으키더니 금세 책갈피가 꽂힌 페이지를 펼쳐 읽게 만들었어.
그 밤이 다시 찾아오면 나는 조금은 다를 수 있을까? 성급히 등을 보이는 대신 마주 보던 그대로 뒷걸을질 치면서 서로의 안녕을 바라볼 수 있을까? 긴 여운이 있는 꿈을 꾼 것 같아. 물방을 맺힌 두 눈을 질끈 감아보지만, 쉽게 멈추지 않는 내 눈물에 잔나비의 노래가 담겨 흐르고 있어. 그 사람에게도 이 노래가 흘러 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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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를 듣고 써내려간 상상의 드라마입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면 감사해요. 시어만큼 예쁜 이 노랫말을 다시금 새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