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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정연주 Mar 26. 2020

<노래하는 아무개를 만나는 다양한 방법에 대한 고찰>

'나니아 옷장 속의 대중음악사' <말과 글> 칼럼.

     매일 새벽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새벽 5시부터 7시까지 <라디오를 켜라 정연주입니다(이하 ‘라라’)>라는 제목을 달고 만들어지는 소리가 1초에 95,100,000번의 진동이 일어나는 주파수에 실려 변환되는 과정을 거쳐 이 주파수에 맞춘 수신기를 통해 내 목소리와 음악이 복조되어 얹힌 프로그램으로 청취자들과 만나고 있다. 일반적인 활동 시간대와 비교해 워낙 이른 시간대이다 보니 타 주파수를 활용하는 방송사의 프로그램은 미리 녹음을 통해 전달되는 방식이 대부분이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방송사는 실시간으로 청취자와 내가 만나도록 한다. 라디오 방송이 이 땅에서 시작된 것이 1927년 2월의 일이니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대중매체로써 그 실효성을 90년 넘게 검증 받아오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중 최근 20년 정도의 라디오 방송사를 가까이에서 함께 만들어온 사람으로서 라디오 방송의 변치 않는 주효한 구성은 바로 청취자들의 사연과 그에 따라 청해지는 음악의 조합이라 여긴다.

“지금 이 노래가 듣고 싶어 신청합니다.”

“잠 좀 깨게 신나는 음악 부탁해요.”

“어제 우연히 알게 돼 저장해 놓은 노래인데, 라라 청취자들께도 들려드리고 싶어 신청합니다.”

    문득, 아직도 라디오라는 매체에 무엇을 청하는 수고로움을 통해 음악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그야말로 스트리밍이라는 최첨단 방식을 통해 음악을 ‘흘려듣는’, 나의 취향을 나보다 더 잘 알아내 수많은 곡 가운데 내가 원할 것 같은 음악을 콕 집어서 들려주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는 시대를 살면서 말이다.  



     음악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의 귀를 통해 마음을 움직이는 역할을 시작한 이후의 가장 첫 소통 방식은 물론 직접 연주를 하고 듣는 것이었겠다. 음악소리를 지척에서 직접 듣는 방식 외에는 아무 것도 없던 시절, 깊은사랑에 둘러앉은 선비들에게 청아한 소리를 들려주던 아무개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그 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무엇인가가 등장한다. 1887년 멀리 미국의 ‘「토머스 에디슨」옹’이 발명한 ‘류성긔’가 그것이다. 소리로 지각될 수 있는 공기의 진동(振動)을 전축의 디스크와 같은 저장매체에 기록하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아무개의 소리가 한반도에서도 1920년 즈음 ‘소리판’에 기록되어 ‘류성긔’라 불리었던 축음기를 통해 흘러나올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원통 안에 꼬마사람이 들어앉아 있다느니 귀신이 있다느니 하며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신기해했으리라. 원통형 축음기를 거쳐 원반형 축음기가 보급되면서 이 기기는 부유한 가정의 귀중품으로, 한 마을의 자랑으로, 혹은 신문사 최고의 경품으로 자리 잡아간다. 아무개의 소리는 아무개가 늙어 사라진 후에도, 아무개가 소리를 녹음하던 그 때 그 시절의 목소리 그대로 ‘소리판’에 저장되어 축음기를 통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그 소리를 혼자 또는 여럿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장사치들은 유성기를 활용해 돈벌이에 나서기도 한다. 장터를 돌며 천막을 친 채 유성기로 음악을 들려주는 일종의 ‘음악 감상실’을 만들어, 입장한 사람들에게 ‘인단’과 같은 약을 팔았던 약장수들이 대표적이다.

<사진출처:네이버 이미지>
축음기 신문광고<사진출처:네이버 이미지>

    아무개의 소리가 담겼던 초기 소리판은 주석제의 양철판으로 만들어져 있었기에 소리판을 지났던 바늘은 한번 쓰면 갈아야했다. 이후 소리판의 원료는 ‘쉬락크고무’류 또는 ‘카-본 뿌락쿄’ 라든가 여러 가지 전료류가 사용되었다. ‘류셩긔’ 광고가 신문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1930년대에는 축음기를 버릴 때에도 이모저모 재활용 할 것들이 있다고 친절히 알려주기도 하고, 귀한 축음기를 어떻게 관리하고 ‘레코-드’판을 어찌 다루어야 할지도 알려준다.      



<버릴 것도 요묘조모로- 축음긔>

▼ 축음긔(蓄音機)의 헌바눌을 마즈막 버리게 될 때 이것으로 병을 씻는데 쓰면 조흡니다 씨슬병 속에 너코 흔들으면 병이 깨끗이 씨서집니다

(하략)

                                                                                                  동아일보 1931.7.18. 5면    

<질음질음오는비 레코-드 손질은 이같이>

질음질음오는비 레코-드 습기와열기에 특별히주의 손질은 이같이     

축음기든지 레코-드 소리판이든지 잘가지고 못가지는데 따러서 그것의 목숨이 아조 달러집니다. 더구나 레코 –드를 모르는 분이 만일 부주의를한다면 곰팡이가 생이고 또 판이 뒤틀리기도하야 아조못쓰게되는것이니 충분한주의를 하지않으면 아니됩니다.

◇레코-드의 제일 금물은◇

더운기운과 몬지의 축축한기운입니다.몬지는 언제나주의를하여야 할것이지만 습기와 열기는 지금부터 주의하지않으면 아니되는것입니다. 여름이되면 이 두가지는 참으로 질색할것입니다. 레코-드는 언제든지 겨울이든지 여름이든지 수평으로 뉘여놓는 것이 제일 좋읍니다. 케-스에 넣은대로 세워두는 것은 좋지못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캐비네트”에 넣어두는것이자 이것도 나무가 잘말르지 않엇든지 사개가맞지 않든지하면 뒤틀리고 또 습기가 들어가는것이니 살때에주의하지않으면 아니됩니다. 그러고나무로는 오동나무로만든 것이 제일 이상적입니다.

(하략)

                                                                                                   동아일보 1934.7.2. 4면     




이렇게 아무개의 소리가 기록된 ‘소리판’은 시대가 지나며 그 재료며 형태가 달라진다.  사람들은 아무개의 소리가 담긴 것을 각 시기마다 SP로, LP로, 카세트 테이프라는 것에 소장했고, 디지털이라는 기술과 만난 이후에는 CD라는 것으로, 이후에는 MP3 라는 것에 저장해 듣거나, 가장 최근에는 실시간으로 재생되어 흘려지는 ‘스트리밍’ 속에서 아무개의 소리를 만났다. 아예 가상현실이란 것을 이용해 소리하는 아무개를 내 옆에 홀로그램으로 두고 노래와 춤을 즐기기도 한다. 음악을 듣고 소비하는데 있어 지난 100년간의 변화가 이러했다.

   그렇게 비약적인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오는 것에 지쳐서일까? 많은 사람들이 뒤를 돌아본다. 흘려듣는 것이 아닌 실체를 가진 것에 담긴 음악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자꾸 많아진다. 비닐로 만들어진 LP를 원하고 카세트테이프를 찾는다. 급기야 전 세계적으로 작년에 팔린 LP의 양이 CD보다 많아졌단다. 디지털 음원과 CD의 매출은 뚝뚝 떨어지는데, LP를 사는 사람들은 무려 12년째 쑥쑥 많아지고 있단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의 방식을 접하고 그것에 매력을 느끼고 동경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LP를 틀 수 있는 턴테이블은 갖고 있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아무개의 음악을 LP라는 실체로 갖고픈 세대가 생겨났단다.

턴테이블을 판매하는 홈쇼핑 관련 광고 <사진출처: 네이버 이미지>


그럼, 이건 어떤 이유일까? 내가 원하는 대로 이런 저런 다양한 방식으로 음악을 소유하고 소비하기가 그리 어려운 시기가 아님에도 굳이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당첨 확률이 크지도 않은 상황에서 듣고픈 음악을 청하고 기다리는 것 말이다. 떨어져있으나 같이 있고픈, 내 감정이 담긴 신청곡을 라디오를 통해 다른 이도 함께 듣고 공감해주기를 바라고픈 마음은 아닐까 싶다. 음악이 필요한 순간, 음악 뿐 아니라 음악을 전달하는 DJ의 마음과 그 음악을 같은 시간에 듣고 있을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존재 자체에서 위안을 받는 건 아닐까 싶다.

나아가, 다양한 기술의 발달로 굳이 무엇인가를 보고 듣기 위해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됨에도 공연 예술은 왜 쉼 없이 이어지고 있고 더 세련되어질까? 현실과 다르지 않을 만큼의 영상 기술에도 불구하고, 저 멀리 무대 위 작은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나의 아무개를 보기 위해 우리는 왜 그 수많은 수고로움을 자처할까? 기기를 거쳐 전달되면 여전히 반감되고 마는 그와 나의 연결 고리를 현장에서 찾고픈 건 아닐지, 체온을 가진 생명으로서 같은 공간에서 함께 공기를 나눠 호흡하며 교감할 수 있는 에너지를 체험하고픈 건 아닐지 싶다.


인간과 공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나, 아직은 서로가 공생의 방법을 알지 못해 두려울 수밖에 없는 새로운 바이러스 탓에 작년 연말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인이 크게 긴장하고 있다. 일상 속 자연스러웠던 만남들에 경계해야 하는 너무도 부자연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럽다. 소리하는 아무개를 가까이 무대에서 만나 직접 음악을 청해 듣는 일이, 그와 나를 위해서나, 또 나와 같은 공간에서 그의 음악을 듣고자 모인 사람들 모두에게 건강을 위협할 수 있는 일이 되어 조심해야 한다는 점이 참으로 안타깝다.

아무쪼록 하루 빨리 아무개의 소리를 공연장을 찾아 직접 듣든, 라디오에 청해 방송을 통해 듣든, 스트리밍으로 흘려듣든, VR로 최대한 실사와 같은 모습으로 즐기든, 모처럼 새로 장만한 LP를 턴테이블에 올려 듣든, 다시금 마음 편히 원하는 대로 골라 즐길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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