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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정연주 Oct 24. 2020

BTS의 빌보드 1위에 부쳐

한국어문기자협회지 <말과 글> '나니아 옷장 속의 대중음악사'기고문

       BTS가 일을 냈다. 바이러스가 창궐해 모든 것이 위축된 시기, 모든 것이 어리둥절한  시기, 방탄소년단이 잠시나마 모든 뉴스를 덮을만한 소식을 만들었다. 무려 100년이 넘는 전통을 갖고 있는 빌보드라는 잡지에서 매기는 음악 순위 1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것도 2020년 9월 13일 현재, 무려 2주 이상 핫100에서 1위 자리를 지키며, 순위를 매기기 시작한 1958년 이래 세워졌던 다양한 기록들에도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예전 같았다면 전 세계를 돌며 무대 위에서 직접 ‘Dynamite’를 터뜨리고 있었을 터인데, 팬들과 가슴 벅차하며 같은 공간에서 직접 그 열기와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뜨거운 광경을 만들어냈을 터인데, 새삼 지금 상황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나저나, 내 이럴 줄 알았다. 올해 초,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기 직전,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며 던진 소감을 들으며, 엉뚱하게도 난, “BTS가 영어로 노래를 부른다면 단박에 빌보드 1위지!”

를 중얼거린 바 있다.

      “자막의 장벽, 그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라는 수상 소감을 들으며, “맞지, 맞아. BTS노래를 영어로 즐기지 못해서 아직, 쟤네가 덜 흥분하는 걸 수도 있어.”라 평했다. <기생충> 얘기에서 갑자기 BTS로 얘기가 튀어 오르는 것을 충분히 이해해준 지인들도 내 말에 동의했다. 또한, 그의 소감을,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 전 영역에 걸쳐 전 세계의 중심인 미국을 향한 ‘봉준호’ 다운 일종의 도발로, 영어가 아닌 언어를 쓰고 있는 세계인들의 존재와 실력에 대해 여전히 알지 못하는 ‘미국이라는 우물 안 개구리’들에게 던지는 일침으로 여기며, 모두들 격하게 공감했었다.


      미국이란 우물이 얼마나 큰 우물인지 간략히 살펴본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넓은 땅 위에 3억 3,10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는 나라, 20조 5,000억 원에 육박하는 GDP로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현재 유일의 패권국가로 존재하(려)는 나라이다. 특히, 풍부한 자본과 뛰어난 기술을 바탕으로 그들의 대중음악과 영화가 세계 각국의 문화에 빠르게 흡수돼 발전했기에, 대중음악과 영화에 있어 전 세계의 중심인 된 나라가 미국이다. 그 덕분에, 혹은 그 탓에, 미국 밖 문화권에 살고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미국이란 나라는 ‘대중문화’ 그 자체로 이해되었고, 반대로, 미국 안에서는 다른 문화권의 모든 것들이 낯설게만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주변국의 자리에 머물렀던 대한민국 출신들이 영화와 대중음악에서 미국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대표하는 아카데미와 빌보드를 통해 연타를 날리고 있으니, 올 한해는 참으로 의미 있는 한 해임이 틀림없다.



米國黑人(미국흑인)의 聲樂會(성악회) 청년회 주최로 명삼십일밤에

동아일보 1920. 7.29.


미국흑인 “아매리카네그로” 삼명과 로서아 여자 한명으로 조직한 성악단(聲樂團)은

세계를 두루 도라다니며 음악을 하든 중 지난 이십륙일에 경성에 들어왔는대

종로중앙청년회의 주최로 명삼십일 금요 하오 팔시에 동회관 안에서 음악회를열터이라는대

그 흑인들의 성악에 대한 텬재는 이로 말할수도 업거니와 자미스러웁고

우수웁게 몸을 쓰는 양은 세계에 유명하다하며 조선에서 흑인의 음악회는

이번이 처음일 뿐 아니라 그들의 동작은 엇지 자미스럽고 우수운지 요절을 할만하다하고

당일에는 경성악대와 기타합창도 잇슬터이오 회비는 이원, 일원, 오십전의 세가지라더라.



      꼭 100년 전 기사이다. 1920년에 우리는 처음으로 미국 흑인들의 자연스러운 몸놀림이 함께하는 성악단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문 꼭 닫고 지내다 세계사적 흐름을 알지 못했던 대한제국은 일본에 통째로 나라를 빼앗기며 개화기를 맞았다. 이후 서양 선교사를 통해 일본을 경유해 들어온 서양음악을 일반인들이 접한다. 주로 찬송가나 유럽의 가곡과 클래식이었다. 1920년대 이후에야, 위의 기사에서 짐작하듯, 흑인들의 연주도 듣고 그 교류가 다양하게 이뤄진다. 그 날 어떤 종류의 성악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어도, 그 인기는 대단했나보다. 이들은 이후 한 차례 더 무대에 올라 그들의 천재성과 몸짓으로 청중들의 배를 그러안게 했다.  



黑人(흑인)의 再次(재차) 韓樂會(성악회)

동아일보 1920 08.01


黑人(흑인)의 再次(재차) 聲樂會(성악회)

명이일 밤에 경성악대주최로 종로청년회에서


지난 삼십일밤에 청년회에서 개최한 미국흑인 “늬그로”의 음악회는 별보와 갓거니와

과연 미국흑인은 음악에 대한 텬재가 잇슬뿐아니라 그몸짓과 우슴거리작란은

참으로 일반텽중으로 하야금 포복전도하게 하얏다 그런데 이와가치 조선에서 처음될뿐 아니라

매우흥미잇는흑인의 음악회를다만 한번만하고 긋침은매우유감이라하야

특별히 경성악대(京城樂隊(경성악대)의 주최로 명이일밤여덜시에 다시 청년회안에서

음악회를 열게되얏다 이제 그 “푸로그래ㅁ”을 대강 보건대 흑인의 출연함이 열 번이나 되고

경성악대에서도 출연할 터이오 특별히 조선젓대 笛(적) 을 잘불리고 유명한 김계선(金桂善)씨도 출연하야 동서음악을 조화하야 들을터이오 무엇으로보던지 오히러 첫날보다 더욱흥미가잇스리라더라



     

 이후 미국의 색채가 강한 대중음악으로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역시 1920년대 말, 재즈부터였다. ‘쟈스’라는 일본식 발음으로 불린 그 음악들은 당시 좁은 의미의 재즈 뿐 아니라 미국풍의 대중음악 전부와 샹송, 칸소네 까지도 포괄하는, 기존 클래식과는 대비되는 대중음악 전부를 일컬었던 일반 명사로 쓰였다. 이런 음악들을, 1927년 개국한 경성방송의 관현악단은 ‘미국 경음악’이라 칭하며 클래식 소품이나 세미클래식과는 구분해 연주하며 방송에서 들려주었다. 2차 세계대전 말에는 일제가 적성국가의 음악, 즉 ‘양(洋)곡에 대한 일체의 활동 금지령’을 내려, 미국 음악들은 잠시 ‘공식적으로는’ 향유될 수 없기도 했다. 허나, 한번 뚫린 귀를 어찌 닫게 할까. 미국 대중음악은 춤과 함께 그 세력을 나날이 키워갔다. 해방 이후 미국의 음악은 더욱 다양하게 우리 귀를 사로잡기 시작한다. 특히,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24군단이 서울과 광주, 부산에 개설한 군 AM라디오를 통해 매일 한 시간 이상 씩 미국의 대중음악을 들려주었던 것이 주효했다. 우리를 해방시켜준 나라, 동경해 마지않는 나라인 미국의 음악이 한국 대중들에게 빠르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1950년 한국전이 터지고 미군이 주축이 된 UN군이 우리나라에 파병된 후에는, 머나먼 극동지역에서 피땀 흘리며 고생하는 군인들에게 대중음악만큼 효과적인 안정제가 없었기에, 당시 한창 미국 내에서 인기를 누리던 마를린 먼로와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사람들이 한국을 찾아 전장에 마련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전쟁을 쉬게 된 이후에는, 서울 속의 미국 영토였던, 미8군 주둔지 무대에 우리 음악인들이 직접 서게 되었다. 관련 연구를 해 오신 작사가 지명길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미8군이 들어오면서 공연단들이 미군부대에 들어가서 클럽에서 공연을 하게 되는데 50년대 중반부터 그게 직업화돼요. 지금은 대중가요를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지만, 실제로 음악인들 전체가 그 무대에 서요. (피난 시절부터) 클래식 음악을 하던 사람들도 먹고 살게 없는 상황에서, 거기서 무슨 피아노 독주회를 할 것도 아니고, 바이올린 연주회를 할 것도 아니고, 할 수 없이 이분들도, 그 교수님들도 쇼단에서 연주를 하는 거예요. 바이올린도 하고 첼로도 하고 피아노도 하고, 그러니까 6.25 이후에 공연문화가 갑자기 수준이 높아져요. 엄청 높아져요. 높아지면서 미8군 쇼라는 것이 미군들이 보기에도 엄청나게 수준이 높은 쇼가 돼요. 빅쇼에서부터 조그만 클럽 쇼까지. 클래식을 하는 순수음악을 하는 사람이나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이나 같이 어울려서 연주를 하고 쇼 만들고 …”


       다양한 분야에서 음악적 숙련도가 높았던 우리나라 음악인들이, 먹고 살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경쟁적으로 미국 현지에서 유행하는 대중음악을 거의 시차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바로바로 소화해 직접 선보였단다. 미8군 무대에서 보여준 우리 음악인들의 역량에 당시 미국 관계자들은 매일 놀랐다고도 한다. 그 무대에 섰던 이들이 동시에 우리 대중음악계로 뻗어 나와 모방을 넘어 자신들의 음악을 하며 우리 대중과도 호흡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우리 대중음악은 본격적으로 미국의 대중음악사와 그 결을 거의 같이 해왔다.



“세계무대 주름잡는 보칼팀”

경향신문 1963. 3.21.


가요나 재즈 싱거」들이 혼란상태를 이루고 자신의 「스타일」을 찾지 못한 채

외국의 「포플러 송」을 흉내 내는 것이 고작이다.

이를 시정하고 「카버」하는 길은 「솔로 보다 중창을 하는 「보칼·팀」을 길러내는 데 있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은 한국의 「그렌·밀러」 송민영씨가 육성해낸 것이 「김시스터즈」였다.

“외국 것을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소화시킨 다음 그것을 세계수준에까지 이끌어 올린다"는

그의 계획이 들어맞았다. 숙자, 민자, 애자의 「김시스터즈」는 이제 한국이 낳은 세계적 「보컬·팀」이 되었다. 「김시스터즈」가 모방에만 그쳤다면 세계무대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 민요의 흥겨운 가락을 그들에게 들려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 후략 -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으로 다시금 조명을 받은 바 있는 ‘김시스터즈’에 대한 이야기이다. 1953년 10대의 나이로 미8군 무대에 서던 쇼단에서 활동을 시작해 ‘한국의 앤드루 시스터즈’라는 별칭을 얻게 된 그들은, 그 재능과 가치를 알아본 ‘흥행사’- 당시에는 오늘날의 ‘매니저’를 흥행사라 불렀다 한다 - ‘팀불’이란 사람과 4주짜리 계약을 맺고 미국으로 진출해 1959년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 쇼 무대에 오르게 된다. 이후 ‘김시스터즈’는 1970년대까지 미국과 우리나라를 오가며 정상급 트리오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이런 우리 대중음악인들의 활동과 해외진출을 볼 때, 양적인 면에서 미국에서의 유입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극히 빈약한 것이었을지라도 그 교류가 결코 일방통행만은 아니었다. 주류의 큰 물결에 비해 작은 물결 정도로 느껴졌겠으나, 미국의 대중음악과 우리 대중음악이 서로 섞이며 주거니 받거니 해왔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통신을 타고 시공간의 제약이 적어질 대로 적어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음악을 시작한 7명의 젊은이들이 전 세계 대중음악 팬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요즘이다. 그 음악적 토양이 어떠했는지 약 100년 전부터 슥 훑어보았다. 누군가는 갑작스러운 ‘이식’이었다 평가하고, 누군가는 모든 것이 ‘흉내 내기’에서 시작했다고도 하지만, 모든 문화의 특성이 사람과 시대가 주체가 되어 서로 흡수하고 섞이고 변형하며 재창조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기에 그런 일방적인 표현에는 동의할 수 없다. 다만, 그 섞임과 어울림에 있어 확실한 조연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였기에 70년 만에 중심을 향해 쏘아올린 성과에 호들갑스럽게 감격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덧붙여, 그동안 BTS가 보여준 저력에 비해 빌보드 핫100 1위 등극이 꽤나 뒤늦었다고 평가하는 사람으로서, 이전, 싸이의 <강남스타일> 빌보드 2위 등극에 놀라 그 뿌리가 궁금해 논문까지 썼던 사람으로서, 아직도 대중문화에 있어 미국이라는 커다란 우물 안에서만 놀려는 사람들에게 자신감 갖고 몇 마디 더 하련다. (영작을 해줘야 하려나?) 다시, 봉준호 감독 이야기다. 아카데미 시상식 뒤, 봉 감독이 자신의 발언을 이렇게 고쳤단다.

       “1인치 장벽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만, 때늦은 소감이 아니었나 싶어요. 이미 장벽은 무너지고 있는 상태였고, 유튜브 스트리밍이나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이미 모두가 연결돼 있어요. 이제는 외국어 영화가 이런 상을 받는 게 사건으로 취급되지 않을 것 같아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올 것 같습니다.”


       이 소감을 포함해, 봉준호 감독의 당시 말들을 빌려 몇 마디 더 보태본다.

“1억 명도 채 안 되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다보니 그동안 한국어 노래가 좀 낯설긴 했을 거예요. 이제 낯설어만 말고 한국어로 된 다양한 노래들을 더 실컷 들어보아요. 이미 장벽은 무너졌고, 들을 수 있는 통로가 얼마나 많아요, 모두가 연결돼 있는걸요. 이제는 영어로 된 음악들만 고수하는 건 너무 ‘로컬’스럽게 느껴지지 않나요? 모든 음악을 자연스럽게 즐겨보아요. I think we use only one language, MUSIC.”


작가의 이전글 <노래하는 아무개를 만나는 다양한 방법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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