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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정연주 May 28. 2021

트로트를 좋아하세요?

한국어문기자협회지 <말과 글> '나니아 옷장 속의 대중음악사' 기고문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주인공에게 사랑이 되고픈 남자가 묻는다. 브람스를 좋아하느냐고. 주인공은 이 물음에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느낀다.

프랑수아즈 사강 소설책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단순한 질문 같으나, 질문을 받는 이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물음들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트로트를 좋아하세요?’ 란 질문은 어떠할까?

BTS를 대표 주자로 한 K-POP이 세계 대중음악계에 초강수를 두고 있는 시기, 국내에서는 2019년부터 올해까지 트로트가 대세로 자리 잡으며 방송가를 꼭 움켜쥐었다. 시작은 한 종편의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부터라 해도 될 듯하다. 실력 있고 저마다 사연 많은 가수들이 귀에 익은 노래들을 참 잘도 불렀다. 그동안 방송에서는 밀려나 좀처럼 들리지 않았던, 다양한 스타일로 새로운 스타들에 의해 ‘맛있게’ 불린 옛 명곡들이 어른들에게 제대로 향수를 느끼게 해주었고, 어른들과 함께 방송을 접한 어린 아이들에게도 신선한 노래로 다가갔다. 그 인기몰이는 다른 방송들 역시 트로트 강풍에 올라타게 만들었다.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트로트라는 장르는 그 이름부터가 사연이 많다. 처음부터 ‘트로트’가 우리 대중가요의 트로트를 일컫지는 않았다. 옛 신문에서 만나본 ‘트로트’는 1920년대에는 ‘트로트 부르스의 교향악’과 같은 말에서 등장하고, 1930년대까지는 ‘탕고’, ‘왈쓰’ 등을 제치고 ‘딴스 음악’으로서 제일 인기가 좋았던 ‘포크스 트로트’라는 말로 종종 지면을 채웠다. 1940년을 거쳐 50년대까지도, “숙녀들이 왈츠 탕고 트로트에 맞춰 서로 억게를 껴안고 서양춤을 춘다.”거나 “땐스 홀에 나가 분주다사하게 트로트를 췄다.”거나 하는 식으로 등장했다. 그러던 것이 점차 춤의 한 종류를 뜻하는 말에서 벗어나 ‘트로트 춤을 추게 했던 음악’을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1963년 3월 2일자 경향신문에서는 ‘이브· 몽탕’과 ‘이베트·지로’의 앨범을 다루며 ‘이브·몽탕’이 ‘세시봉’이라는 곡을 “「폭스 트로트」조(調)로 경쾌한 무드로 호창(好唱)한다.”고 전하고 있다.


2月의 레코드界 트로트曲이 히트

2월의 디스크街는 트로트 一色.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섬마을 선생님”을 비롯, 남진의 “울려고 내가왔나”, 위키리 “눈물을 감추고”, 남일해“추억의 오솔길”,“봉봉”,“육군김일병”,문주란“독집”,현미“애인” 등 팔리는 판은 모두 소위 뽕짱調의 노래들. 트로트의 倭色 여부를 따지기 이전 업자들은 이런 調의 노래가 잘 팔린다는 「하는 수 없는 이유」 때문에 계속 만들어낸다는 辯. -후략-

                                                                                                    1967년 2월 25일 경향신문 8면


    위 기사에서는 두 가지에 주목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트로트를 독립적으로 트로트라 쓴, 당시의 흔치 않은 기사였다는 점이다. 70년대를 훌쩍 넘겨 나온, 이후 기사들에서도 여전히 트로트는 ‘트로트 조(調)’,‘트로트 풍(風)’,‘트로트 계열’의 노래라 쓰이고 있다. 트로트란 말이 그 자체로는, 우리가 칭하고 싶은 그 음악‥,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뭔가 자랑스럽게 여겨지지는 않는‥, 뭔가 가치판단에 있어 복잡하게 만드는‥, 그 음악을 가리키는 말로 아직은 완전히 자신감을 얻지 못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또 하나는, ‘뽕짱’ 또는 ‘뽕짝’, 그리고 ‘왜색’이란 말이다. 이는 트로트와 늘, 같이, 오랫동안, 등장한다. 우리 대중가요산업이 태동할 시기가 바로 일제 시기와 맞물려 있으니, 일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 내용도 그 시절의 분위기를 담았을 테니 어떠했을지 짐작도 되고 실제로도 당시 가요를 들어보면 감정적으로 절절함이 기본이다. 해방 이후에도 대중들의 취향이 급변하지는 않았을 터, 새로이 나라를 되찾았으니 일제의 잔재는 무엇이든 정리하고픈 사회적 판단과는 크게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싹둑 잘라낼 수 없는 ‘뽕짝 뽕짝’하는 4분의 2박자의 리듬에 실린 대중들의 감성과, 지난 치욕의 시기에 있던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얼른 떨쳐내자는 이성이 부딪히는 바로 그 지점에 있던 음악이 바로 트로트였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음악을 가리키는 말, 용어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이었으니, ‘뽕짝’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자니 어감 상 수많은 대중들을 무시하는 느낌이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엄연한 우리 노래를 일컬으며 식민지 시절의 일본말을 그대로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그러한 생각들이 얽혀있는 지점에서 중립적으로 여겨진, 그나마 가장 ‘세련된’ 말로써 ‘트로트’가 선택되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트로트 조의 일본색을 지양해서 탱고를 작곡했는데
한국 가요팬의 구미에도 맞게 불렀다고 대만족”

                      <이봉조 씨가 반한 새 목소리 미성의 차중락 군> 中, 1967.7.8. 경향신문

“올부터는 여태까지의 트로트스타일 노래로부터 탈피, 과거의 이이미를 새롭게 하는 비긴調로 노래를 바꾸어 출발 초기에 듣던 불명예스러운 「왜색조」 운운의 비난을 일소해버리겠다는 것이 포부이기도.”

                           <남진, 스타일 바꿔 왜색조 비난 일소> 中,   1968.1.30.조선일보                                                                 

    또한, 트로트가 대중들로부터 꾸준히 사랑을 받아 온 것과는 별개로, 그에 대한 평가는 만드는 이나 부르는 이 모두에게 꽤나 오랫동안 부정적으로 이어진다. 비단, 위의 기사들에서 볼 수 있듯 ‘왜색’ 때문만은 아니었다. 1970년대 들어서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포크송이 등장해 사랑을 받았다. 미국 대중음악과 그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새로운 우리 노래들이 많은 반향을 일으킨다. 이 과정 속에서 트로트는 계층적 지역적으로도 우월한 지위에 있지 못한 사람들이 향유하는 음악으로 자리매김 된다. 익숙한 노래에만 젖어있기 쉬운 나이든 사람들의 노래, 팝송과 같은 외국음악을 접하기 쉽지 않은 사람들이 즐기는 노래, 대학 교육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 서울 같은 도시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로 듣는 노래가 트로트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다음 기사에서 언급하듯, 팬들의 기호도 간파하지 못한 채 새로운 물결과는 거리가 먼 음악으로 평가받았다.  


가요 디스크 출반 겨우 20장, 트로트 퇴조 두드러져

9월 한 달 동안에 출반된 트로트계열의 디스크數(수)는 고작 20장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진한 실적을 나타내고 있다. 매월 50장을 훨씬 능가하던 출반량이 갑자기 반 이하로 격감된 이유 가운데는 불경기에 허덕이는 최근 레코드 제작업계의 피치 못할 사정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현저하게 달라진 가요팬들의 기호를 아직 간파하지 못한 채 눈치만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중론이다. -중략-

몇몇 노래들이 트로트 계열을 힘겹게 연명 시켜주고 있는 셈인데 그나마 한결같이 몇 개월 전에 발표된 노래들이고 보면 9월 한 달 동안 트로트계열은 긴 하면(夏眠)에 빠진 채 팬들의 하품 소리만 즐기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하잘 것 없는 가사 멜러디에 먹칠만 하고 있는 어레인지의 빈곤, 하소연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가수들의 가창 실력 등이 피곤한 트로트 계열을 갈수록 깊은 잠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1974년 10월 2일, 경향신문 8면


    

    이렇게 깊은 잠에 빠질 것만 같았던 트로트가 부활하게 되니, 해당 음악을 가리키는 말의 태생부터 뭔가 위축됨과 불편함을 가졌던 트로트가 음악 장르로써 전 세대에 걸쳐 당당히 그 자리를 차지하는 데에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도 있으나, 조용필의 등장이 주효했다. 이전 세대의 수많은 실력 있는 음악인들에 더해 조용필의 노래들과 그에 따른 대중의 움직임이 큰 변화의 축을 만들어냈다.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가요계에 나타나 1980년대 한국 대중가요계를 평정했던 그의 출현과 그의 다양한 노래들은, 역설적으로 트로트를 누구나 즐겨도 될 노래로 인식하게 했다. 음악 평론가 임진모는 그의 책, <우리 대중음악의 큰 별들>에서 조용필에 대해 이렇게 쓴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그의 존재가 갖는 의미를 한두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오로지 조용필의 노래만이 '초등학교 교실과 노인정에서 함께 울려 퍼졌다’는 사실이다. 그가 전성기의 화염을 내뿜던 1980년대 초반에 어린아이들은 너도나도 ‘단발머리’의 가성을 흉내 냈고, 20대들은 '고추잠자리' 의 록 리듬에 넋을 잃었으며, 중장년들은 모임을 가질 때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열창했고, 할머니들은 '한오백년'에 어깨 장단을 맞췄다.”

조용필의 공식 첫 앨범 사진

    조용필 스스로도 처음에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취입하고 트로트를 했다는 사실이 창피해서 사람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록 음악 하는 사람이 트로트를 한 것을 자랑스레 내걸기가 ‘좀 그러했단다.’, 당시 트로트의 음악적 지위를 생각하면 스물 예닐곱의 청년이 충분히 가질 만한 ‘그러함’이었으리라. 록 밴드에서 가수가 아닌 기타 연주자로 불리길 바랐던 조용필이 다른 곡들을 녹음하려 준비하다가, 절친이었던 한 선배(축구인 이회택)의 권유로 녹음했던 곡, 트로트 형식이었지만 록 리듬을 넣었고 바이올린 연주도 들어가, 트로트가 우리 정서를 지배하던 때에 록이 결합된 새로운 트로트가 되어 나온 곡, 그리 뜰 줄은 전혀 몰랐던 곡이 바로 ‘돌아와요 부산항에’ 였단다. 조용필은 이 노래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며 가요계에 등장해 전 세대를 아우르는 존재로, 그가 하는 음악은 그것이 트로트든 록이든 어떤 장르든 상관없이 조용필의 이름으로 동등한 지위를 얻게 만들었다.  


    이후 40년의 시계를 빨리 돌려 오늘 날의 트로트를 바라본다. 그동안 트로트는 다양한 장르와 섞이며 세를 키워갔고, 뛰어난 가수들과 명민한 창작가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음악을 기꺼이 좋아해주는 좀 더 다양하고 열린 대중들 덕분에 지금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트로트란 말도 한때 ‘전통가요’란 말과 경합을 벌이는 듯싶더니, 어느새 ‘언어의 줄다리기’에서 승리한 듯하다. 춤의 일종, 춤곡의 리듬을 뜻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음악적 장르를 일컫는 지위를 당당히 갖게 된 말이 바로 ‘트로트’이다. 트로트란 말의 입장에서는 드디어 무언가를 해낸 것 같다.

    지금의 트로트 열풍은 그러나, 대중들 가운데 그나마 현재 지갑을 열 여력이 있는 계층을 정확히 목표로 한 방송가의 전략적 승리로 읽혀 조금은 입맛이 쓰다. 이미 방송가는 또, 뉴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방송이라는 매체에 여전히 충성심을 보여줄 비슷한 계층을 목표로 한, 또 다른 전략적 선택으로 그들의 젊은 날을 소환할 포크송의 부활도 예고하고 있다.

    돌아보건대, 대중문화의 산업적 측면을 무시할 수 있었던 순간이 많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의 음악적 세력이, 나아가 나의 음악적 취향이 방송가의 이런저런 '마름질'에 의해 만들어 졌을 수도 있다 생각하면 당황스럽다. 그리고 여러모로 궁금해진다.


당신, “트로트를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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