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과 현실, 커피와 차
책이 산더미에, 커피 내리는 소리가 그 향만큼 은은히 퍼지고, 갓 구운 빵의 냄새가 한 장 한 장 켜켜이 내려앉은 북카페가 로망인 것은 아마 건물주 정도 되어야 맘 편히 이뤄볼 것 같다는 현실적인 두려움 때문일지 모른다.
아내의 피신처, 북카페 <세이버 앤 페이버>.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북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서던 그날부터 성수동 주민으로서 우리 부부와 세이버 앤 페이버는 같이 성장한 것 같다. 성수동에서 마음 붙일 곳 찾던 우리가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높이 쌓여가는 책들, 새로 추가되는 메뉴들, 그리고 빠르게 늘어가는 사람들.
해가 질 즈음이면 눈에 정면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그 자리가 제일 좋다. 책은 공기를 차분하게 만들고, 모두들 그 공기에 묻혀 무언가를 읽어나간다. 핸드폰에 빨려 들어가는 사람이 없는 그곳.
세이버 앤 페이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며 아내는 그곳에서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길 싫어했다. 책들이 날 기다렸기에 그들의 페이지를 열어주지 않는다면 슬퍼할 것 같은 걸까.
(여보, 근데 집에 있는 책들도 좀...)
책이 몇 권 없을 때부터 드나들었기에 카페 주인이 어떤 일을 해오셨는지 알 수 있었다. 단 한 권의 책도 장식으로 꽂혀있지 않던 책장에서 그 삶의 이야기가 스며 나와 흰 벽이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실제 그분이 부자일지, 건물주는 아닐지, 궁금증이 부질 없어진다. 다만 충분한 수익을 내고 계셔서,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가슴 귀퉁이 또 하나의 조각을 잃지 않게 되길 바랄 뿐. 손님이 없으면 함께 앉아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눠봐도 좋겠다. 그런데 이젠 사람이 너무 많아 그러지도 못하겠지. 그러니 당신은 가지 마시라. 아니면 내가 없을 때 후다닥 커피 한잔 쿠키 한 조각 팔아주고 떠나시라. 성수동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몇 없는 피난처가 피난처로서 존속되도록.
그리고 이젠 제목을 잊은, 백 페이지쯤 읽었던 어떤 책이 간직하고 있을 나에 대한 추억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