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애자 여러분들이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곳곳에도 여러 퀴어 업소가 있다. 술집, 칵테일 바, 클럽, 가라오케 등. 혼자 가서 술 마시기 부담스러운 보통의 술집들과는 다르게 이쪽 업소에는 혼자 오는 손님들이 많다. 동성애자라는 공통분모 하나만으로 나이, 학벌, 재력, 직업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사람들이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바쁘게 데이트 상대를 찾고 있는 거라면 또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퇴근 후 그냥 들어가기 아쉬운 사람들, 심심한 주말 저녁 가볍게 술 마시러 나온 사람들에게는 그런 요소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혼자 술 마시면서 바텐더와 얘기나 좀 하다 들어가려고 했는데 옆에서 같이 떠들어 줄 사람이 있으면 땡큐고 아님 마는 정도라고나 할까. 나도 혼자 술집에 놀러 갈 때면 오늘은 어떤 예상치 못한 만남이 있으려나 기대하고는 한다.
그런 식으로 나이도 이름도 전화번호도 사는 곳도 정확히 모르지만 종종 마주치는 술친구들이 있다. 그들과 만나면 오랜만이다, 요즘은 뭐 하고 사느냐, 애인 생긴 거냐 등의 시시하지만 정감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도 듣는 걸 더 좋아하는데, 내가 하는 이야기들이야 오래 살며 온갖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들 앞에서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얘기들일 거고, 무덤덤하게 살다 보니 재밌었던 일화가 있어도 금방 까먹는 바람에 막상 얘기를 해보라고 하면 할 얘기가 없는 까닭이었다. 그렇게 나는 상대의 이야기에 호응해 주며 호기심을 보이기도 하고 자연스레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 역할이 된다. 나이도 직업도 성격도 제각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다양한 맛의 사탕이 들어있는 사탕상자를 여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다.
내가 특히나 좋아하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추억 얘기다. 그중에서도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듣는 걸 좋아한다. 통금이 있었던 시절 이쪽 술집에 모여 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창문을 막고 밤을 새웠다는 얘기, 인터넷도 전화기도 없었던 시절 극장에서 아쉽게 스쳐 지나가기만 한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들. 당시에는 동성애자라는 개념이 더욱 낯설었던 시기라 사람을 만나는 것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가며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돌아갈 수 없는 추억에 대한 그리움과 지울 수 없는 아쉬움이 보였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인연을 붙잡는 것도 힘들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사람을 만나는 건 쉬워졌지만 그만큼 쉽게 연을 끊기도 하는 지금과 참 달랐구나 싶어 진다. 지금은 타인과의 만남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간절함과 애절함이 많이 사라져 버린 건 아닐까 생각한다. 공중전화 수화기를 붙잡고 종이 쪼가리에 적힌 연락처에 전화를 걸며 마음 졸이던 일도, 며칠 전 보냈던 편지의 답장이 도착했는지 설레는 마음으로 우편함을 확인해 보는 일도 이제는 옛날 일로만 남아버렸다. 실망하는 일도 많았겠지만 우연히 찾아오는 기쁨도 그만큼 더 컸을 그 시절에 나는 모종의 낭만을 느꼈다.
나는 내 성정체성을 중학생 때 알게 되었고 성인이 되자마자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느낀 건 내가 머무를 곳이 있다는 소속감보다는 너무나 쉽게 끊어지는 인연에 대한 허무함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리움 없는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좋았던 기억들도 물론 있지만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아쉬움은 없다. 그래서인지 고작 하룻밤 함께했던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조금 부러웠다. 어쩌면 붙잡을 수있었을지도 모를 떠나간 인연들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눈동자는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내게도 그런 인연이 생길까?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을까? 언젠가 그때 뒤돌아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게 될까? 잘 모르겠다. 아직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