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NI Feb 17. 2020

함께 살 수 없어도 살아가

결혼한 사람이 본 영화 <결혼 이야기>



한참 전에 동생의 추천으로 <결혼 이야기>를 봤다. 먼저 영화를 본 사람에게 아무 생각 없이 “재밌어?”라고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미묘했다.


“재미라기보다는… 형부랑은 같이 보지 마.”

동생은 싱거운 데가 있다. 감정적으로 말하는 법이 없다. 근데 이상하게 신뢰가 간다. 그래서 옷을 고르거나 크고 작은 결정을 할 때 미주알고주알 물어보는 건가 싶다. 추천이 기억에 남아서 혼자 집에 있는 날 영화를 봤다.    사랑이 끝나고 헤어짐으로 시작하는 영화라니. 퇴근 후 나른한 몸으로 아이패드를 낀 채 러브 액추얼리급 영화를 기대했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고 만남부터 이별까지 관계 변화를 보여주는 전개도 아니었다. 이혼 전문 변호사를 찾은 아내 니콜(스칼렛 요한슨)의 신세 한탄 후에 남편 찰리(아담 드라이버)도 변호사를 만나 이혼에 맞서는 흐름이다. 이혼 서류, 변호사, 소송, 양육권 분쟁은 결혼이라는 형식을 끝내는 것에 불과하지만 영화 제목이 그렇듯 이야기가 남아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랑해서 같이 살면서 아이를 낳고 남편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긴 니콜과 그런 아내를 전적으로 믿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온 찰리. 극단을 운영하는 연출가 남편 옆에서 배우인 니콜은 단원으로 활약한다. 이 정도를 두 사람의 결혼 생활로 정리할 수 있다. 결혼 생활에서는 아무래도 ‘나’가 아닌 ‘우리’가 도드라진다. 부모 직장 성격 취향 꿈 등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함께 사는 일이다. 남이라면 안 보고 안 들어도 될 행동과 말, 사소한 습관까지 공유한다. 사랑으로 상쇄되는 서로의 면면이 있을 것이다. 사실 영화에서는 그게 커다란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니콜은 남편이 자신의 꿈과 가능성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건 카시트를 장착하지 못하는 남편에 대한 실망이 아니다. 아내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바라보지 않는 데 있다.   결혼 생활에서 주체적인 나로 존중받는 일은 중요하다. 아이를 갖는 건 부부가 함께하는 경험이지만 나만의 경험이기도 하다는 니콜의 말처럼. 어쩌면 결혼은 부부라는 탈을 쓴 개개인의 삶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결혼한 여자가 주체성을 인정받기란 쉽지 않다. 외국은 어떤지 모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더 그런 것 같다. 결혼한 자식은 출가했을 뿐 여전히 품 안의 자식인 경우가 태반이다. 명절 즈음의 인터넷 게시판이나 브런치 글 제목을 보면 유독 며느리들의 한이 느껴진다. 아직 아이가 없는 우리 부부의 역사에도 말 못 할 사연이 허다하다. 자식과 며느리를 가족의 테두리에 묶어 두고 역할을 강요하다 보니 탈이 날 수밖에. 가족의 의미를 의무로 해석하는 몇몇 어른들 때문에 시월드, 며느라기 같은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사회와 가정에서 개인을 규정하는 이름은 여럿 있지만 그래도 나는 나일뿐이다. 영화 속 정서와 다르긴 해도 개인의 주체성이 존중받기를 바란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더더욱. 승소에 목을 맨 변호사에 둘러싸일 때가 아닌 오직 두 사람이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에서는 소름이 돋았다. 니콜이 ‘당신을 평생 알아야 한다니 끔찍해! ‘(I can’t believe I have to know you forever!)라고 대사를 할 땐 누가 머리를 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담인지 험담인지 모를 온갖 증오를 긁어내고, 긁어낸 자리를 찢어 마비시키는 대화. 관계가 진저리 난다는 걸 이보다 극악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난 매일 눈뜰 때마다 당신이 죽길 바라!’(every day i wake up and i hope you’re dead)라는 찰리의 대사보다 더 살 떨리는 말이었다. 사랑이 서로의 사소함을 위대하게 만들었듯 끝날 때도 요란하다. 그것도 다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남편과 나는 서로를 응원하는 편이다. 투닥거리면서 시소의 균형을 잡듯 살고 있다. 각자 하는 일이 다르고 원하는 개인의 성과가 있다. 그걸 공유하고 시기하고 채찍질도 하면서 지낼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늘 함께 할 수 있다는 걸 빼고 나 자신만 생각할 때 결혼이라는 제도가 미울 때도 있다. 그렇지만 결국 추슬러야 하는 사람도 나다. 꼭 결혼이 아니더라도 관계 속에서 내가 결여되고 소모되는 감정을 느낀다는 건 위험 신호이다. 니콜이 변호사에게 찰리와의 결혼생활을 “내가 살아난 게 아니라 찰리에게 생기를 더해 줬던 것“이라고 고백하듯 말이다. 배터리가 방전되는 기분으로 살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둘 중 누가 잘못한 거라고 평가하고 싶지 않다. 찰리 또한 자신의 성과와 꿈이 아내의 것과 닮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랑하는 자식과 함께 우리가 사는 뉴욕이 있고 이끌어야 할 단원이 있다는 책임감도 한몫했을 터. 결혼은 가끔 상대의 세상을 내 세상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서로에게 현혹되고 내 것이 네 것이 되며 나의 꿈이 우리의 꿈으로 쉽게 환원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게 있다. 심지어 취향 조차도. 그런 게 함께 산다는 걸까? 이런 의문은 여전히 의문인 채로 찰리가 부른 노랫말 속에 담겼다. 모든 가사가 좋았지만 간략하게 옮겨본다.




  Somebody need me too much 날 너무 필요로 하는 사람 Somebody know me too well 날 너무 잘 아는 사람 Somebody pull me up short 충격으로 날 마비시키고 And put me through hell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 And give me support 그리고 살아가도록 for being alive, make me alive, make me alive 날 도와주지. 내가 살아가게 하지. 내가 살아가게 하지. Make me confused 날 헷갈리게 해 Mock me with praise 찬사로 날 가지고 놀고 Let me be used 날 이용하지 Vary my days. but alone is alone, not alive 내 삶을 변화시켜. 하지만 혼자는 혼자일 뿐, 살아가는 게 아니야

태어난 것도 처음인데 너와 내가 만나 우리로 사는 것도 처음이다. 뉴욕이 좋다는 찰리, 엘에이가 좋다는 니콜처럼 우리라는 이름으로 산다는 건 어렵다. 멀다가도 가깝고, 말이 되다가도 말이 안 된다. 힘들게 만들고 또 살아가게 만든다. 앞뒤가 맞지 않는 가사처럼 사랑이 단순하지 않은 건 함께 살면서 생기는 모순을 겪어야 한다는 역설에 있다. 모순을 현상으로 바라보고 나를 분리하는 순간 사랑은 언제든 깨질 수도 있다. 관계에도 노력이 필요한 이유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랑이 끝나도 삶은 이어진다. 늘 아내가 다듬어 주던 머리카락은 다시 무성해지고, 역 앞에서 말을 건네는 사람을 지나치며 더 이상 그녀를 기억할 필요도 없다. 사랑이 끝나는 것으로 시작되는 영화의 묘미는 지독한 일상성으로 포착된다. 특히 니콜이 찰리의 신발끈을 묶어주는 장면 말이다. 풀어진 신발끈을 보고 모른 척할 수도 있었지만 불러 세워 말없이 묶어준다. 찰나였지만 지나치지 않는 표정과 신발을 가볍게 치는 손이 연결되며 클로즈업 된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이 더 이상 부부가 아니라는 것 따위를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줄 뿐이다. 이런 아름다운 미장센을 숨겨놓다니. 노아 바움백은 참 멋진 감독이다. 나라면 그렇게 쿨하게 엑스 허즈번의 신발끈을 묶어주지 못하겠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