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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AULE Sep 13. 2020

이별을 돌아보니 후회가 남는 것은

내가 아니었던 나

이별(이자 파혼)한 지 8주가 지났다. 새롭게 후회되는 것들을 발견했다. 헤어지기 싫었던 내가 했던 진심이 아니었던 말들과 하지 못하고 참았던 말들. 그러니까 내가 아니었던 나의 모습들이다.


그는 내가 솔직해서 좋다고 했다. 원하는 것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원래 성격이 그랬고, 그가 알아서 내 마음을 헤아려줄것이라는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다. 헤어진 당일 밤에는 더 사랑해주지 못한 게 후회가 된다느니, 무너질 것 같아서 얼굴 보고 못 헤어지겠다느니 하던 인간이 그 다음 날 제정신이 아닌 듯한 상태에서 내게 카톡을 보냈는지, 이런 말이 있었다.


“나 이제와서 사랑은 잘 모르겠는데,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멋진 여자랑 연애했어. 누가 혹시라도 불쌍하다고 동정해도 무시해! 화이팅!”


7년을 만나고 결혼 한 달 전 헤어지는 마당에 사랑인지 모르겠다는 소리에, 화이팅이라는 단어에 얘 진짜 미쳐버렸나,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 너같이 소심하고 타성에 젖어사는 인간이 어디가서 나같은 사람 만나겠냐’ 약간 이별의 아픔에서 벗어나게도 됐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면, 애인은 물론 상사와 지도교수님께도 웃으면서 할 말은 하는 솔직함이 장점이자 매력인 내가 결혼이 위기에 처하자 하고픈 말을 못하고, 해야할 말을 못했던 게 참 후회가 된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그가 결혼을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던 날, 나 역시 내가 주최한 청첩 모임에 청첩장 없이 다녀왔었다. 모두 빠르게 기혼자가 된 10년지기 동아리 친구들과의 모임이었다. 꽤 큰 규모의 공연 동아리 멤버들이라 다들 한 목소리 내는 똑부러지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왜 청첩장 주겠다고 불러놓고 청첩장을 안 들고 나왔는 지 이야기를 나눴고 그들은 내가 무슨 선택을 하든 전적으로 나의 편이라고 응원해주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파혼 소식을 전한 후, 그들 중 한 명이 내게 자기들끼리 나눴던 말을 전해주었다.


“애들이 네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자책하는 모습이 너무 속상하다고 했어. 너를 그렇게 만드는 사람들이랑 헤어져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내가 그렇게 기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힘들지만 나름대로 중심을 잡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보니 나는 파혼 위기 일주일간 ‘좀 더 싹싹하게 굴걸, 그렇게 (대단하고 말도 안되게) 오해하실 줄 알았더라면 그런 말을 하지 말걸, 그 때 내가 좀 더 참을걸.’ 이런 생각에 젖어 살았단걸 깨달았다.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가 오해를 시작한 시점을 홀로 찾아 헤매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수 백 번 후회하고, 절망하고 있었다. 평범했다면 아무 일 없었을 일들을 내게 직접 묻는 대신 확대해석하고 대화없이(최종 보스는 그의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나를 내치기로 결정한 그들의 문제인데(물론 그가 결혼하기에 모자란 인간이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지만), 나는 불쌍한 나를 탓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더 참고, 삭이고 넘겨서 결혼을 했다면 어땠을까. 나는 원래의 나로 돌아가서 그들과 가족이 될 수 있었을까. 그들에게 진짜 나를 보여줄 수 있었을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걸 알기 위해 많은 것들을 해왔다. 대학생때는 멋모르고, 그러나 운 좋게 인턴십 등을 통해 여러 직장들을 두루 경험해봤다. 그래서 통번역사를 준비했다가, 기자가 되고 싶어 언론고시에도 발을 들였다가 평생 그 일을 할 자신이 없어서 다시 평범한 직장인을 꿈꿨다. 그렇지만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회사들도 결국 관뒀다. 첫 직장에선 자영업자들에게 부당한 계약을 성사시키고 싶지 않아서, 두 번째 직장에선 재벌 기업들 세금 줄여준 덕분에 잘 먹고 잘 사는 일 안 하고 싶어서 퇴사했다. 내 신념에 따라 신중하게 목소리를 내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했고 과연 드디어 가장 오랜 기간동안 몸 담고 있게 됐다.


나라는 인간은 솔직함과 신념 빼면 거의 시체인 것이다. 그런 내가 이 유별난 시가에 필요한 고분고분한 며느리라는 역할을 잘 해냈을 리가 없다. 며느리가 되기 전부터 이미 구박데기가 되었기에 나는 죄 지은 사람 마냥 언제나 자신을 검열하며 내가 아닌 채로 살았을 것이다. 세상에 미움받고 싶은 며느리가 어디있다고 이런 저런 눈치보며 준비를 했는데도 나는 결국 아들과 갈라놓고 싶은 사람이었는걸. 가족이 됐다면 파국이었을테다. 냉철하고, 애교라고는 전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시어머니와 단둘이 유럽여행도 다녀오는 친구가 내게 말했다. “언니같은 큰 그릇 품기엔 간장종지같은 집안이었어.” 조금 뻣뻣해도 아들이 선택한 반려자라는 이유 하나로 예쁨받는 며느리가 된다. 내 가장 큰 정체성을 스스로 내려놓게 만드는 사람들을 가족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안타깝게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오랜 기간 곁에서 그가 원하는 걸 찾을 수 있도록 갖은 애를 썼지만 실패했다.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문제였다. 헤어질 때 그는 내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나를 떠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해서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결혼 한 달 전에 듣기엔 정말 어이가 없는 말이지만 오랜 시간 그를 보아온 나는 인간 대 인간으로 그의 결정을 이해했었다. 그는 본인이 잘하는 것만, 괜찮고 안전한 선택만 해왔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남들이 안 가는 길을 용감하게 가는 나를 응원하고, 좋아해줬다. 내가 막연한 미래와 가벼운 주머니에 미안해할 때면, 나라도 원하는 걸 하길 바란다고 했다. 자신은 평범한 월급쟁이로 살테니 나라도 어디서 선생님 소리 듣고, 시간 강사여도 좋으니 교수님 소리 들으면 좋겠다고. 내가 원하는 건 선생님 소리가 아니라 꾸준히 사회에 도움이 될 좋은 연구를 하는 것일 뿐이라고, 혹시나 내가 사회적으로 성공하길 바라는 건가 싶어 대답하면 그때는 자기 자신도 해결할 수 없는 욕망을 나에게 투영하고 있어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게나 다른 사람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아는 사람과 자기 자신조차 모르는 사람이었다. 환영받지 못하는 며느리라는 지위로 인해 나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나와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데 새로운 역할들만 더 맡아야 하는 그가 이 결혼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서로에게 잘 된 일일테다. (물론 한국의 며느리들은 결코 시가에 100퍼센트 솔직할 수 없겠지만) 솔직함이 아이덴티티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나는 그들 앞에서는 나로 살지 못했을테고 그는 영원히 자신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라도 헤어져서 참 다행이다(아직 고맙다는 말은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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