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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AULE Sep 17. 2020

야구 응원 팀을 못 바꾸는 이유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으니

야구. 처음에는 우리 사이의 방해물이었다. 어린시절 주말마다 할아버지와 아빠가 거실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서 말없이 보시던 정적인 스포츠. 나는 지오디 오빠들이 나오는 버라이어티를 봐야 하는데 야구는 끝날 생각이 없었다. 내게 야구는 오랫동안 뚱뚱한 선수들이 껌만 씹고 침만 찍찍 뱉는 불쾌한 풍경의 스포츠였다. 그래서였을까, 데이트 중 틈이 날때마다 네이버 스포츠란을 켜서 확인하는 그의 모습이 정말 꼴보기 싫었다. 오래 참다가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그 사이마다 꼭 야구를 봐야 하냐고. 그럴거면 야구를 보지, 나랑 데이트는 왜 하냐고. 나랑 같이 있을 때 넋놓고 본 것도 아닌데, 스물 여섯의 나도 그렇게 어렸었다. 그는, 아니 6년 전 그 애는 내가 화를 낸게 얼마나 억울했는지 코가 빨개져서 말도 못했다. 눈오는 홍대 길, 잔뜩 화가 난 내 뒤에서 훌쩍이며 걷는 그를 돌아보며 내가 너무 심했나, 그에게 야구장에 데려가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 시절 동아리 친구들과 야구장에 한 번 가본 적 있었다. 가서 알게 된 건 야구장엔 생각보다 주전부리가 많다는 것이었다. 피자에 햄버거에 김밥에다 쥐포까지. 잠실구장 외야에서 ‘이기는 팀 우리팀’을 외치며 그저 한없이 먹은 기억 뿐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야구장 데이트를 제안하고 가서도 막상 나는 닭다리를 뜯는 데 집중했다. 주변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서 응원을 할 때면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공놀이가 뭐가 그렇게 좋은거지?’ 뻘줌하게 닭다리를 들고 어설프게 서다, 앉았다를 반복했다. 경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면서도 일년에 두어 번 정도는 그와 함께 야구장에 갔다. 가끔은 유부초밥과 과일 같은 간단한 도시락도 싸갔다. 탁 트인 데서 맥주 마시는 기분이 좋았고, 그가 입안에 먹을 걸 우겨넣어 가득 찬 볼따구니가 신나게 실룩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평소엔 쉽게 흥분하거나 들뜨지 않는 그가 야구장에서 광대를 비죽거리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야구에 더 관심을 가져보기로 결심했다.




2018년 봄, 김광현이 마운드에 올라 긴 머리로 인사를 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관중석에선 환호보다 큰 우렁찬 박수가 쏟아져나왔다.


“왜 인사 하는거야? 무슨 일이야?”


9명의 선수들이 뛰고, 볼과 스트라이크가 있으며 공보다 먼저 사람이 들어와야 점수가 난다는 것 정도만 인지하고 있었다. 김광현을 알아볼 리 없었던 내 물음에 그는 다정하게 대답해주었다.


“우리 팀 에이슨데 부상이었다가 오랜만에 복귀해서 그래.”


우리 사이에서는 보통 질문을 받고, 답을 주는 입장이었던 나는 야구에서 관계가 전복된 것이 재밌고 짜릿했다. 그가 으스댈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동시에 내가 너무 몰라서 귀찮아하면 어쩌나 걱정도 했다.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나는 장발의 투수가 허리 숙여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광경에 약간 상기된 그 애를 보며 나도 모르게 야구를 진심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와 틈나는 대로 함께 경기를 보았다. 들어봤자 이해도 못할 룰들에 대해 꼬치꼬치 질문하면 그는 언제나 성실하고, 차분하게 대답해주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반복해서 물어본 덕인지 점점 야구 지식을 습득했고, 과연 아는 만큼 보인다고 어느새 혼자서도 야구를 챙겨보게 됐다. 그리고 그 애를 따라 자연스럽게 와이번스를 응원하게 되었다. 내게도 ‘우리팀’이라는 것이 생겼다. 그렇게 공통의 취미를 연애 6년차가 되어서 갖게 되었다. 더군다나 와이번스가 오랜만에 상승세를 타는 덕분에 그 해 우리는 홈 구장은 물론 집에서 가까운 잠실구장을 자주 오갔다. 예전엔 보기 싫었던 껌 짝짝 씹는 모습도, 침 찍찍 뱉는 모습도 우리 선수 집중력의 상징으로 긍정하게 됐고, 우리팀 공격때는 자리에 엉덩이 붙일 새 없이 열심히 응원가를 따라 부르게 됐다. 야구도 보고, 바람도 쐬고, 맛있는 것도 먹고,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고. 늘 즐거운 야구장 데이트였다.


그러던 9월의 문학야구장. 한동민이 린드블럼을 상대로 역전 만루홈런을 치던 순간에 그와 나는 순도 100퍼센트의 환희에 젖어 펄쩍펄쩍 뛰었다. 그 날 나는 구단 이벤트로 구매한 빨간 유니폼에 한동민 선수의 이름표를 박았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 집에 와서 네이버 스포츠 코너의 영상을 보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우리가 좋다고 뛰는 모습이 하이라이트에 고스란히 잡혀있었다. 응원석도 아니고 높은 일반석에 있었는데, 우리를 찍었다니. 야구를 모르는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동영상 링크를 보내며 자랑했다. 그리고 정말 팬으로서는 영광스럽게도 우리의 그 모습은 간만의 포스트 시즌 출격을 응원하는 구단의 특집 영상에도 한번 더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도 ‘팬들과 함께하는-‘이라는 자막이 뜰 때. 가문의 영광이자 가보로 간직하고 나중에 우리 아이들한테 자랑하자고 낄낄거렸다.


그리고 11월 초의 가을 야구. 문학에서 진행된 모든 플레이오프 경기를 직관했던 나와 그는 마지막 5차전에도 퇴근 후 어렵사리 문학구장에 출석했다. 역전에 역전, 반전을 거듭하며 팬들을 쥐락펴락하는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게임. 박병호의 말도 안되는 동점 홈런에 역전 적시타를 마주하며 새내기 야구팬인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밤 열한시가 다 된 시각, 집에 가는 지하철도 이미 끊긴 상태였다. 더는 심장이 쫄려서 못 보겠다고, 택시 잡기도 어려울텐데 지금이라도 가자고 졸랐지만 그는 믿음을 가져보라고 했다. 1점 차이니까, 뒤집을 수 있다고 믿어보자고 했다. 이렇게 기대하다가 지면 얼마나 상심이 클 지 막막했지만 의외로 믿음직스러운 그애의 말에 다시 일어나서 응원에 합류했다. 한 구, 한 구에 심장이 쿵쾅댔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야구장엔 먹으러 다녔던 난데 더는 아무것도 먹히지 않았고, 늦가을 밤에 추울까봐 입었던 패딩도 벗어버렸다. 공놀이 따위에 안절부절 못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팬들을 우습게 본 게 얼마 전이었던 나는 그들의 모습 그대로 양 손 모아 우주를 향해 기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정말 믿기지 않던 김강민의 동점 홈런. 그리고 나와 그가 팀의 영광스러운 영원한 기록으로 남을 수 있도록 해 준 한동민의 극적인 역전 홈런!


굿바이, 굿바이, 굿바이!  타구가 잠실을 향해 뻗어갑니다!


그를 믿고 밤 열한 시 반이 되도록 문학 야구장에 남아있었던 건 내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로 손꼽는다. 뚝심있게 자리를 지키며 내 손을 꽉 쥐었던 그의 단단한 눈빛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의 함성이, 그 카타르시스가 눈 감으면 선명하다. 그간의 내 삶에서 아무 의미 없던 것이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게 됐다.


한국시리즈 진출이 확정된 이후, 한껏 들뜬 마음에 우리는 다른 관중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었다. 6년차 연인이었던 그는 처음으로 우리가 함께 나온 사진을 프로필에 올렸다. 겨우 뒷모습이었건만 그는 회사 사람들로부터 여자친구가 정말 존재하긴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뿌듯했다. 그래서 나도 그와 같은 사진을 프로필로 설정했다. 우리 팀은 2018년 한국 프로야구 우승팀이고, 우리는 이제 공식 연인이었다.






“돌아보면 너무나 아름다웠고 내 인생에 다시 없을 순간들이었어”라는 지오디 오빠들의 명곡 가사마냥 참 행복한 기억이었다. 그래서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최하위권에서 허덕이고 있는 지금, 나는 종종 2018년의 와이번스를 찾으러 간다.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플레이오프 5차전 하이라이트를, 나와 그의 삶에서 정말 특별했던 한동민의 역전 만루홈런을 찾아본다. 그래, 이렇게 좋았었지. 정말 신기하게도 눈물이 나는 대신 그저 광대가 치솟는 엄마 미소를 짓고 있다. 정우영 캐스터의 벅찬 목소리를 여러 번 돌려 들으면서도 나는 히죽거리고 있었다. 우리 팀 이렇게 잘 하고 좋았었지. 우리 정말 행복했었어.


스포츠가 주는 극적이고도 짜릿한 쾌감이 우리의 추억을 더 미화시켰을 여지도 있다. 왜, 롤러코스터를 같이 타면 서로에 대한 호감이 높아진다는 연구도 있는 것처럼. 그렇지만 나는 그 때의 사랑을 확신한다. 우리는 조건 없이 응원을 쏟아 부었고, 돈과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열렬히 와이번스를 사랑했다. 그 시절을 사랑했던 너와 내 모습을, 행복했던 그 때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부진이 안타깝고, 또 미워도 나는 팀을 바꾸기 어려울 것 같다. 순수하고 순진하게 모든 걸 바쳐 사랑했고,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기에.



잊어야 한다고 해서 잊혀지겠니


올해 들어 처음 6연승을 달리고 있지만 고꾸라진 올해 성적을 보면 그가 떠오른다. 우리 관계의 나락을 보는 것만 같아서. 어쩌면 우리의 하이라이트도 2018년이 아니었을까, 하는 바보같은 생각도 한다. 점수를 통 못 내는 날이면 딱 그 자식같다며 쌤통이라며 욕을 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시작도 너 때문이었고, 행복했던 것도 너 때문이었으니 나는 와이번스를 계속 응원하려 한다. 미워 죽겠고 한심해 죽겠어도 내가 사랑한 존재니까. 양팔을 들고 펄쩍 뛰며 좋아하는 우리 모습을 자랑스레 보여줄 아이들은 없겠지만 나는 혼자서라도 종종 그때를 추억하고 또 즐거워 할 것 같다. 굿바이, 굿바이,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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