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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AULE Nov 08. 2020

가을 그 한 가운데

파혼 후 세 번의 만남(2)


오후 두 시. 늦을 것 같다길래 약속을 한 시간이나 더 늦췄는데도 그는 또 늦었다. 나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여전하구나, 생각하며 애플스토어 앞에서 아이패드가 담긴 쇼핑백을 건네 받았다. 얼굴이 약간 탄 것 같아보였다. 처음 보는 빳빳한 새 셔츠를 입고 처음 보는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나도 새 신 신고 나왔어야 했는데 익숙한 내 신발이 아쉬웠다. 자연스레 쇼핑백을 챙겨든 내게 그는 점심을 먹자고 했다. 아이패드를 받은 마당에 안 먹겠다고 하면 너무 치사할 것 같았다. 그러자고 했다. 오다가 본 곳이 있다길래 가자고 했지만 그는 길을 잃고 헤맸고, 결국 우리는 사귈 때 종종 갔던 메밀국수 집에 들어가게 됐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익숙하게 주문을 했다. 마스크 때문에 사놓고선 잘 안 끼던 큼지막한 귀걸이를 하고 간 내게 못 보던 귀걸이라며 아는 척을 했다. 그가 선물해줬던 시계를 차느라 만나는 동안엔 잘 안 했던 손목시계도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귀걸이에 시계에, 뭐 이렇게 반짝거리냐고 웃는 그에게 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너랑 헤어져서 그렇다고 받아쳤다. 그는 내가 아주 재밌는 농담을 할 때처럼 고개를 넘기며 소리내어 웃었다.


메밀국수가 나왔다. 간장 종지에 면을 덜어서 휘휘 저었다. 너는 어떻게 오늘도 늦냐는 내 핀잔에 자기가 항상 늦는 건 아니었다고 항변했다. 나는 단순히 약속시간에 늦었다는 얘기가 아니라고 말했다.


“물리적인 늦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


내 말을 알아 듣긴 할까.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간장 그릇을 한 손으로 들고 국수를 마셨다. 후루룩 거리는 소리와 국수를 먹고 있는 내 입이 내 것이 아닌 듯 어색했다. 내가 국수를 밀어넣는 내내 그는 말이 없었다. 대신 코 푸는 소리가 들렸다.


‘고추냉이를 많이 넣었나, 매운 것도 없는데 쟨 또 왜 이렇게 코를 푸는거야, 진짜.’


그릇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햇살이 들어오는 대낮의 메밀국수 집에서 그는 냅킨을 구겨 눈물을 닦고, 코를 풀고 있었다. 파혼으로 가는 과정에서 수없이 울던 나와 달리 눈물 한 번 보이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와서 울고 있었다. 헛웃음이 났다.


“왜 울어? 이제와서 왜 울어?”


그는 목이 메어서 모르겠다고 말했다. 싸구려 냅킨으로 미처 다 닦이지 않는 눈물때문에 눈가가 번들거렸다. 글썽이는 눈동자로 나를 보는 대신 창밖을 바라봤다. 그가 우는 걸 처음 보는데도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통쾌했다. 묘한 승리감이 찾아왔다. 나는 정면으로 마주했고, 울만큼 울어서 이젠 너 때문에 울지 않는데. 비겁하게 피하느라 지난 시간과 사랑까지 부정하던 너는 이제서야. 바보같은 놈, 불쌍한 멍청이.


결제를 하고 나왔다. 날이 맑았다. 햇살은 따뜻했다. 이번엔 내가 커피나 한 잔 하자고 했다. 왜 울었는지 듣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파혼 과정에서 그가 했던 말과 행동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그 때의 우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나도 내가 아니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 그 사건에서 멀어지게 되면 그 때의 우리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이고 또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파혼 후 어떻게 지냈는지, 나를 놓은 너는 그래서 정말로 다른 삶을 살아보고 있는지, 무엇을 배웠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리고 그 때 내게 차마 하지 못했던 말, 또는 그 때 했던 말들 중 진심이 아니었던 말은 없는지.


애석하게도 날 좋은 휴일의 가로수길엔 카페마다 사람이 꽉 차있었고 길거리도 인파로 붐볐다. 결국 커피를 사갖곤 그의 차를 타고 집 근처 가까운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가면서 파혼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어떻게 다시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내내 비치는 햇살이 좋았고, 차에서 내려 맞는 강바람은 더욱이 시원했다. 청명한 한글날이었다. 약속이나 한 듯 마포대교를 향해 걸었다. 키 커보이려고 굽이 좀 있는 운동화를 샀다며 멋쩍게 웃는 그에게 그래봤자라고 비웃었지만 이내 내 구두가 전보다 좀 낡은 것 같다는 소리에 다시 한 번 새 신발을 신고 오지 않았던 걸 후회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강이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날씨를 만끽하러 나온 즐거운 사람들 속에서 말없이 강을 바라봤다. 강 건너 남산타워도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의 신혼집과 가까웠던 그 곳. 침묵이 흘렀다. 내 안에선 소리없는 아우성이 일었다.


‘너, 나에게 할 말 있잖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먼저 얘기해주길 아니, 그가 솔직하길 바랐다. 이제는 좀 솔직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는 이제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내가 좋아했던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돌아봐주길, 먼저 입을 열어주길 바랐다. 그러나 주차장이 점점 가까워져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해는 아직도 중천에 떠있었다.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나 보고싶었지?”


그가 말없이 돌아봤다. 대낮의 한강공원. 우리가 서있던 곳 근처에서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들은 삼삼오오 돗자리를 펴놓고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한없이 흔들렸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이 벌어졌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난 보고싶었어. 한 번만 안아보자.”


그는 말없이 순순히 팔을 벌렸고 우리는 포옹을 했다. 익숙한 따뜻한 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가 다시 코를 훌쩍이는 소리에 눈물을 참았다.


‘그래, 너도 힘들었겠지. 고생 많았어.’


달래듯이 등을 쓰다듬었다. 마스크를 사이에 두고 닿은 뺨도 따뜻했다. 그는 그저 나를 가만히 안고 있었다. 팔을 풀어 얼굴을 보니 그는 또 울고 있었다. 왜 우냐고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과 눈부신 햇빛 속에서 눈물이 잔뜩 묻은 눈으로 그는 내게 왜 오늘 만나자고 했냐고 물어봤다. 오늘 시간 되냐길래 된다고 한 것밖에 없는데, 되물으며 깨달았다.


‘나랑 더 있고 싶구나.’


정해둔 약속이 있어서 가야 한다며 나를 집에 데려다주는 짧은 시간동안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쪽으로 향하는 차창 안으로 서서히 지는 해가 쏟아져 들어왔다. 눈물이 채 다 마르지 않은 그의 눈가가 햇빛 때문에 반짝거렸다. 그렇게 많이 울었던 내가 안 우는데, 그가 울었다. 정말이지 내겐 너무나 야속한 뒤늦은 눈물. 후회인지, 미안함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 것으로 내가 듣고싶은 말을 대신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이패드 잘 쓰겠다고, 덤덤하게 잘가라고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이번엔 지난 여름처럼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집 안에는 잠시나마 함께였던 우리를 내리쬐던 해가 느즈막히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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