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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AULE Jun 09. 2021

바람이 부네요

파혼 에필로그2

몇 달 전에는 이 글들을 다 지워버리고 싶기도 했다. 처절했던 그 마음이 떠올라서.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닥치는 대로 썼고 내 상처를 보라고, 고발하듯 비난했던 나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생각을 덮어두고 멀리하다가 5월 초에 그에게 일처리 때문에 오랜만에 연락을 하게 됐다. 법적으로 내가 할 자격이 없는 일이니 협조 좀 부탁한다고 무미건조한 사무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진작에 마무리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답장을 보냈다. 나는 그런 그에게 협조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는 다시금 늦어서 미안하다 했고 나 역시 늦게 부탁했음에도 들어주어서 고맙다 말했다. 그 짧은 대화에서 완벽히 끝난 우리의 관계가 보였다. 나는 그에게 미안한 사람이었고, 그는 내게 고마운 존재가 됐다.


그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는 괴로움과 귀찮음에 하소연했더니 친구들은 감정을 배제하고 정말 일처리 하듯이 보내라고 조언해줬다. 그렇게 전날 밤부터 열 번은 고친 메시지에 내 마음도 딱딱해졌었는데. 그가 보낸 미안하다는 한 마디에 웃기게도 눈물이 왈칵 차오르고 말았었다. 모든 미안하다는 말은 이미 늦었다. 그렇지만 헤어진 지 열 달은 된 시점에 받은 갑작스런 연락에 미안하다고 먼저 말할 수 있는 네 진심을 느껴서 그랬을테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우리를 위해 정말 잘 된 일이지. 날 그렇게 놓아줘서 고마워.'


나는 이제 그를 원망하지 않고 그냥 보내줄 수 있게 되었다.




올해 초, 내가 그 애 때문에 좋아하게 된 와이번스가 랜더스로 바뀌어버리는 초유의 사태에 기분이 참 묘했다. 그를 잊으라고 세상까지 다 바뀌는 것만 같았다. 팀을 바꿀 타이밍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다들 그러듯 한 번 마음을 준 야구팀을 져버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 나는 계속 랜더스를 좋아하기로 했다. 과연 우리 팀은 작년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으로 새로운 출발을 잘 해나가고 있다. 당분간 투수가 없어서 걱정이긴 한데 그래도, 그래도 작년보다는 좋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보고 있다. 회사 상사들한테서 왜 랜더스를 좋아하냐고 질문받으면 ‘그냥 예전에 그쪽에 살아서요’라고 대답하면서 너를 떠올리긴 하지만, 나는 이제 그냥 너와는 관계없이 완전한 야구팬이 되었다. 다음 주에는 옆 팀 사람들과 근처 치킨집에서 야구 경기를 보며 맥주 한 잔을 하기로 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내 평생 이런 술 약속은 없었을텐데 말야. 너로 인해 좋아하게 됐지만 이젠 내 것이 되었어.


최근엔 테니스에 새롭게  빠졌다. 이전 글에서 말했던 코치님이 이직하게 되면서 새로운 코치님을 맞아했는데, 오히려 이전 분보다  열심히 가르쳐 주시기 때문.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어서 결혼 사진 촬영 준비하느라 장만했던 삼각대를 놓고 레슨을 기록하고, 공유하고 있다. 이전 코치님들과 달리  정도 치면 동호회 나가서 게임도 해보라고 하셔서 신났다. 그런 코치님은 요새  라켓을 유심히 보시더니 조금  무거운 걸로 바꿔도 좋겠다 조언하셨다.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사줬던 라켓과도 이별하는 날이 왔기에. 친구 덕분에 동호회에 초대받아 나가기로 했고, 이용하는 코트 특성상 여태껏 신어온 그가 사준 테니스화가 아닌 새로운 운동화를 하나  준비하게  것도 좋았다. 언제나 그가 있던 곳에서 나만의 테니스 세계를 새롭게 다져가고 있었다. 세상도, 나도 변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할 때보다 더 즐기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이제는 내 것이 된 것들. 지금 내 세상엔 그가 없지만 내 세상은 그가 만들어 둔 것이었다. 야구도, 테니스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며 친한 친구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울었다. 그 애는 내게 이렇게 재밌는 세계를 열어줬는데 나는 그 애한테 뭘 해줬을지 모르겠다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열 다섯의 여름을 장식했던 브라운아이드소울의 '정말 사랑했을까'의 가사를 친구로 10년, 연인으로 7년, 다시 남이 된 이제서야 이해하게 됐다. 작고 좁은 나의 세상 속 살던 너는 행복하긴 했을지. 눈시울을 붉힌 내게 너처럼 멋지게 사는 법을 배웠을 거라고 꼭 안아주던 친구들이 있었다. 정말 그런 거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갈등을 외면하고 살았던 그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법을, 원하는 길이라면 확신을 갖기 어려워도 뚝심있게 나아가면 된다는 걸 보여줬다면. 그래, 그만두자는 편지에서 내가 농담처럼 나중에 출마한다면 무조건 날 뽑을거라고 한 거 보니 배운 게 있는 것 같기도 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웃었고 친구는 걘 찌질하게 무슨 그런 말까지 썼냐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남들보다 늦은 나이지만 드디어 독립도 했다. 교환학생으로 프랑스에서 반 년 혼자 산 적은 있었지만 한국에서 혼자 사는 건 처음이다. 내 친한 지인들은 이미 결혼을 했거나, 아가를 키우고 있거나, 결혼을 앞두고 있는 와중에 혼자 나가 살게 되었지만 조바심이 나기 보다는 외려 여유롭다. 둘 이상이서 살고 있는 모두가 부러워하고(설령 부러운 척이라 해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온전히 내가 지배하는 공간’을 나도 갖게 됐기 때문일테다. 헤어지면서 넌 내게 가족들한테서 나와서 따로 살라고 웃으며 얘기했는데. 나 정말 그렇게 하고 있어. 재밌지. 나는 정말이지 나아가고 있어.


파혼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불행했을거다. 결혼 한 달 전에서야 '너희는 결혼하면 불행할거야'라던 그 가족의 말은 당시엔 너무나 큰 상처였지만. 맞아, 그랬을거에요. 나도, 당신들도, 세상도 이렇게 자유롭고 멋진 나를 만나지 못했을거야. 시간은 흐르고, 바람이 불었고, 덕분에 세상과 나는 모두 변했다. 누구에게도 감히 힘들다고 말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깊게 절망하고 상처받은 계절을 지나온 지금의 내가 정말 좋다. 행복하다. 그래서 파혼 이후의 지저분한 감정의 기록을 지우지 않기로 했다. 그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기에. 그러니 어떤 이유로든 제 글을 보러 들어오신 여러분도 너무 힘들어 하지 않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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