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경아 Jun 07. 2023

보험회사에서의 1년 회고: 그래도 해보자고 말하기까지

보험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2편

그동안 회사 생활이 어떠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 참 난감했다. 세 번째 회사로 보험회사를 선택했고 브랜드디자이너가 된 지 1년 하고 6개월이 되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갈피조차 잡지 못해 삽질한 날이 절반, 나머지 절반은 못하겠다고 우는 날의 연속이었다. 보험 업계에서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예상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훨씬 어려움이 많았으니까. 몸에서 잔병치레로 반응이 올 때마다 퇴사까지 고민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낯선 업계로의 이직’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안일했다. 디자이너는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과 협업하는 직업인 데다, 어떤 업계의 브랜드를 만나더라도 그에 맞는 솔루션을 제공해야 한다. 그래서 평생 보험에 관심조차 없었지만, 브랜드디자인의 대상인 ‘보험’은 다른 업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보험’이 공부 대상이 아니라 진짜 나의 일이 되기까지는 장벽이 높았다. 작업물에 들어가는 보험 용어부터 기획할 때 고려해야하는 법적인 규제까지 어느 것 하나 낯설지 않은 게 없었다. 보험회사와 고객 사이의 정보의 불균형은 얼마나 심한지, 고객 입장에 더 가까운 내게는 보이지 않는 프로세스와 문제를 찾아 헤매는데 어딜 어떻게 헤매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물론 보험회사라고 해서 브랜드디자이너가 보험 상품과 업계의 법적인 문제까지 챙겨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브랜드 경험 전반을 점검하고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야 한다. 보험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내게는 모든 일의 시작이 보험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용어와 법률, 경험의 구조까지 하나씩 동료들에게 물어보며 본업인 디자인으로 가는 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었다.


브랜드디자이너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 일이 알고 보니 다른 직군의 일이라 손을 뗀 적도, 업계 관행이나 규제와 관련된 큰 규모의 뿌리 깊은 문제라서 선뜻 손대지 못한 적도 있다. 좋은 아이디어로 프로세스와 법적인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도 디자인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제한 없이 자유롭지는 못하다. 고객과 ‘신뢰와 보장’으로 연결된 금융회사이기 때문에 업의 본질을 반영할 수 없는 아이디어와 디자인은 논의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다.




역할도 방향도 너무나 다른 사람들끼리 모였다.


이직도 겨우 한 번 해봤을 뿐인데 두 번째니까 적응에 더 수월할 거라고 착각했다. 내가 이직한 시점은 신설된 디자인본부에 10명 내외의 디자이너들이 각자 다른 경험을 갖고 이제 막 모였을 때였다. 그래서였을까? 경력자들끼리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팀워크와 시너지가 발휘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과 동료들이 필요했다. 워낙 다른 환경에서 지내다가 만났기 때문에 서로를 몰라서 생긴 시행착오가 많았다. 특히 소통부터 일을 하는 방식과 과정, 공유까지 모든 과정을 하나씩 다시 점검하고 개선하는 건 정해진 답이 없어서 막막했고,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요구하기 때문에 지난한 과정이었다.


일하는 환경과 역할 자체가 크게 바뀌기도 했다. 이직 전의 환경은 자사 브랜드에 필요한 디자인을 전담하는 역할이라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었고, 프로젝트별 담당자와 직접 소통해서 진행이 빠르고 수월했다. 자율과 책임이 중요했던 이전 회사와 다르게 현재 회사에서는 체계와 공유가 중요하다. 모든 업무는 수평적으로 일하되, 결정은 수직적이다. 팀 리더-본부 리더로 이어지는 순차 보고가 필요하고, 과정마다 공유하는 자리가 빈번하다. 결정할 수 있는 범위가 좁아지고 회사의 체계에 나를 맞춰가는 과정에서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나의 성격은 조금씩 위축되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지난 1년은 내내 어두운 표정이었던 것 같다. 결국 퇴사를 결정하고 회사 선배에게 얘기했던 자리에서 선배에게 이 회사를 계속 다니는 이유를 물어봤다. 선배는 아직 이직할 정도로 뭔가를 해보거나 보여주지 못했고, 리더 때문에 힘들긴 하지만 그만큼 리더에게 배울 것이 많다고 했다. 선배도 나처럼 다른 업계에서 왔고 일하는 환경이 완전 달라졌으며 그로 인해 꽤나 괴로워하고 있었으나 그는 나처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힘듦과 리더에게 배운 것을 양분 삼아 자신의 커리어를 능동적으로 채워가는 중이었다. 선배와 얘기를 나눈 다음날 출근해서 책상에 앉았는데 무언가 공기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나는 왜 문제의 해결을 퇴사로 생각했을까?


얼마간의 고민 끝에 ‘그래도 해보자’는 마음을 다잡았다. 업계와 업무 환경까지 ‘낯선 새로움’에 적응하느라 작년 한 해는 나뿐만 아니라 팀 전체가 고군분투했으므로 지난 날의 힘듦은 당연했을지 모른다. 매일 울면서 출근했던 날들도 있으니 앞으로는 다른 어려움이 생겨도 전보다 힘들겠냐는 마음, 이제는 피하지 말고 어떻게든 하나씩 해결해봐야겠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선배처럼 어려움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동료들이 그동안 많아졌고, 이들은 알면 알수록 멋있고 배울 점이 많다는 것도 깨달았다.


시간이라는 수확물을 향해!


회사에서 브랜드디자이너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찾아다니며 방황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회사 차원에서도 조금씩 명확한 R&R을 만들고 있다. 브랜드디자인 부서에서 R&D 성격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준 회사의 신뢰와 지원에 감사함을 느낀다. ‘보험’이라는 낯선 존재를 언제 이렇게 또 깊게 고민해 볼 수 있을까? 이 고민의 끝은 해결이 아니라 반대와 한계의 벽에 부딪혀 해결 못한 문제들을 마음의 짐으로 남겨두는 결말일 수도 있다.


그래도 언젠가 지금의 회사를 그만둔다면, 빛을 발하지 못하더라도 나의 고민과 시행착오를 모두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다. 보험처럼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구조의 업계에는 게으른 완벽주의자보다 부지런한 도전주의자가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보험을 너무 모르는 내가 부끄러워 그 모습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이제는 모른다면 고객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알고 있다면 나만의 관점을 담아 우리 브랜드의 색깔을 보여주고 싶다. [보험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시리즈는 이 과정의 중요한 기록이다.





작가의 이전글 브랜드의 정체성은 진정성이 만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