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미국에 도착한 때는 겨울이 끝나가던 시점이었고, 쌀쌀한 캘리포니아의 봄을 지나 어느새 녹음이 우거진 밴쿠버에 이르렀다. 나는 아주 운이 좋았다. 기간을 통틀어봐도 나다니지 못할 정도로 날이 춥거나 더운 적이 거의 없었다. 매일이 쾌청한 덕분에, 비가 내려도 '감수성을 자극해주는 좋은 날씨구나'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투명한 하늘 속 여행이 즐겁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가슴팍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 정도의 만족감과 함께 거리를 거닐 수 있었다. 이 즐거움은 뉴욕에서 가장 크게 부풀어올랐다. 빛이 쏟아져내리는 평일 낮의 소호, 적당히 자라 푹신푹신한 쉽 메도우의 잔디, 맨해튼의 옆모습을 볼 수 있는 스모개스버그, 알 수 없는 언어가 자연스럽게 떠도는 아스토리아... 초여름의 햇살은 발을 딛는 모든 장소를 반짝이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서 나는, 내 인생 역시 같은 계절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빳빳한 초록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초여름. 아주 설익지도 무르익지도 않은 순간을 맞이하였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계절의 변화를 인지한다는 사실은 그보다 더 큰 기쁨이었고 말이다. 여행 중, 청춘을 갓 열기 시작한 친구들을 많이 만나보았으나 그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봄은 싱그러우나 가볍다. 손에 잡히지도 않을 거면서 궤도 없이 부유해야만 하는 꽃가루이다. 그에 반해 초여름은 조금 더 실체가 있는 계절이다. 나뭇가지에 매달릴 힘이 있는 초록 잎사귀이다.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여행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불안의 근원을 파헤치면서도 나는 늘 여유로울 수 있었다. 이미 튼튼하게 뿌리를 내린 자아가 있었으므로.
그렇기 때문에 초여름은 너무나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햇빛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벅찬 일인지, 발걸음에 무게가 실려있다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 누군가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지나간 스스로의 봄으로 돌아가고프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놓이는 일인지. 여유 속에서 많은 것을 정립해낼 수 있는 시기임이 틀림없다.
#SummerIs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