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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성 Apr 22. 2020

2020. 4. 속초여행

바다가 보였다. 신통찮았다. 바다는 멀리서 보면 하나의 푸른 덩어리일 뿐이다. 처음 맞닥뜨리면 탁 트이는 기분에 끌리지만 곧 담담해진다. 바다는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이고 내 위치를 바꿔가면서 살피지 않으면 거기가 거기처럼 보이는게 전부다. 그리고 파도가 치지 않으면 맥이 빠진다. 해안선이 단조로우면 쉽게 질린다. 그 바다가 태평양이나 대서양이라면 대범한 상상이라도 해보지만, 속초 앞바다에서 멀리 바라보았자 혼슈 섬의 서쪽 해안 정도다. 그래도 한참을 바라보니 배가고팠다.


근처 순댓집에 들어갔다. 문어비빔밥에 순대 약간에 만구천원, 갯배 필스너 맥주가 칠천원. 크래프트 맥주가 열종류 가까이 되는것 같은데, 뭐가 잘 팔리냐고 물으니 '아가씨들이 이걸 좋아하데예' 하면서 추천해 준게 갯배다. 합계 이만 육천원. 돈이 아깝다. 오늘 여기까지 세시간 운전한 기름값도 그보다는 적게 들었다. 문어는 해동이 제대로 안되었고, 아바이 순대는 좀 시시했고, 갯배는 글쎄, 거창한 이름에 세심한 디자인의 크래프트 맥주보다는 하이네켄이 낫다는 내 신념을 다시 한번 강화시켜주었다.  


그런데 마음에 든 것은 식당 아줌마의 사투리. 난 예전부터 강원도 사투리를 좋아했다. 경상도, 전라도에서 3년씩 살아봤는데, 경상도 방언은 다급하고 우악스럽고, 전라도 방언은 답답하고 능청맞은 느낌이라 둘 다 그저 그랬다. 물론 예쁜 아가씨들이 이 사투리를 쓰면 경상도는 꼬집어주고 싶고 전라도는 너털 웃음을 짓게 만든다. 경상도에서 ‘뭐라카노’, 전라도에서 ‘어쯜까’, 처럼 듣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말도 있다. 그런데 강원도 사투리는 들을때마다 그 기분이 든다. 아 이거 어떡하!죠, 이렇다는데!요. 이거 밥값 이만 육천원인데!요, 어떡하죠. 그러면 이쪽에서는 뭐라 항의 할수가 없다. 어쩔 수 없네요. 수긍하면서 체념하게 된달까.  


그리고 숙소로 갔다. 설악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가깝고 비스트로 ‘애비로드’가 있다고 해서 이곳 숙소를 골랐다. 세시 반에 도착했는데, 애비로드는 네시에 닫았다가 내일 열시에나 문을 연다고 한다. 설악산 케이블카는 강풍으로 운행을 중단했다고 한다. 방은 기껏 마룻바닥 방을 예약했더니 업그레이드해준다고 해서 좋아했는데 질색하는 카펫 방으로 내줬다. 흠, 그렇다는데!요, 어떡하!죠. 내가 하는게 그렇!죠 뭐.


사실 속초도 별로 다를게 없다고 생각했다. 일을 마치고 설악산 쪽으로 향하기 전의 속초 시내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침울한 아스팔트, 어디서나 시선을 가리는 고층 아파트, 걸려들기를 바라는 속도제한 카메라, 당신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복덕방, 이게 왜 이가격이야 싶은 이디야 커피, 다시 갈 일 없는 식당, 무표정한 젊은층, 찌푸린 노년층, 세븐 일레븐. 어딜 가나 마찬가지겠지. 이대로 차를 몰아 금강산쪽으로 가도 마찬가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저 번화하지 않은 서울같은 느낌이었달까.  


그런데 설악산으로 접어드는 도로에 들어서니 생각이 바뀌어갔다. 이차선 도로 양옆에 늘어선 느티나무들은 이제 막 연둣빛을 발하고 있었고, 개벚나무들은 마지막 색을 뺏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 세월과 바람에 항의하는 휘어진 소나무들이 땅에 뿌리박고 버티고 있었다. 공기는 원래 이런건가 싶을 정도로 신선했고, 기온은 지금이 몇월인가 싶을 정도로 낮았다. 바람은 이거 왜이래 싶을 정도로 강했다. 해가 들었다가 잠깐 비가 흩뿌렸다가 음산했다가 다시 해가 들었다. 아아, 강원도구나.  


짐도 풀지 않고 비스트로 애비로드에 올라가보았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세시 사십분이었다. 잽싸게 맥주를 시켰다. 그놈의 로컬 맥주. 로컬 맥주는 보통 맛이 없다. 로컬 맥주가 로컬 맥주인 이유는 내가 사는 곳까지 배급될만한 능력이 안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맛있는 로컬 맥주는 보스톤의 사무엘 아담스, 벨기에의 오발, 스페인의 에스테야 갈리시아 레제르바 정도이다. 사실 이 맥주들은 이제 로컬이라고 할 수 없을만큼 글로벌하다. 아무튼 애비로드에서 파는 맥주는, 설악산을 감상하면서 마신다는 어드밴티지를 등에 업고도 비난받아 마땅했다. 내 경험으로 이 정도의 어드밴티지를 누리면서도 맛이 없는 맥주는 인도의 사막을 바라보며 마신 샌드파이퍼 정도뿐이다.


그래도 애비로드 테라스는 근사했다. 아무도 없어서 술잔을 들고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며 설악산을 감상할 수 있었다. 바람을 맞으며 가슴을 펴고 고독한 사내처럼 원하는게 없다는듯이, 바람을 등지며 한껏 웅크리고 늙은 비구니처럼 잃을게 없다는 듯이 20분을 보냈다. 실내에서는 비틀즈 전시물을 감상했다. 전시물들이 테이블 뒤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다면 그들이 보이면서도 안보이는척, 그들은 보여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안보여지는 척해야 하는 수고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아무도 없어서 그럴 필요가 없었다. 비틀즈 멤버 전원이 싸인했다는 기타, 존레논이 입고 나왔다는 가죽 점퍼 등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이 옷을 입었다고 해서 어하드데이즈나잇트가 더 거칠게 느껴지거나 저 헤어스타일을 했다고 해서 헤이주드가 더 부드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냥 이런 것들은 유명인사의 부산물인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건 쓸데없는 크리틱이다. 사실 강원도 구석에 있는 호텔에 이런 컬렉션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치 않았고, 제법 괜찮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호텔 입구에 놓여있는 전시용 이층버스 안에 흘러나오는 음악이 모두 비틀즈 원곡이 아니라 커버곡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낮에 보았던 컬렉션들의 진정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곡 자체는 편집된 부분이 거의 없는 것 같은데, 목소리가 비틀즈 멤버 목소리가 아니다. 페니레인 원곡은 아메리카노 두모금쯤 마셨을 때의 담백함이 느껴져야 하는데, 여기서 들리는 곡은 상한 우유가 섞여있다. 헬프 원곡은 고생한 뒤 구걸하는 느낌이라면, 지금 나오는 곡은 내가 어려웠던 시절에 구걸할 뻔했던 경험을 안도하면서 회상하는 기분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는 스트로베리 필즈포에버가 나오는데, 오 이런, 원곡은 약빨고 노래하고 있다면, 이 곡은 젊은 시절 약간 방탕했던 것조차 후회하는 도덕선생님의 일기같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비틀즈 멤버 네 명이 사인한 기타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것은 마치 애비로드 앨범 자켓을 크게 확대하여 인쇄한 다음에 액자에 걸어놓고 원래 그곳에서 촬영한 것 같은 흉내를 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못마땅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애비로드라고 이름붙여놓고서, 애비로드 앨범의 곡들에 대한 헌정이 전혀 없다. 애비로드 앨범의 하이라이트는, 내 생각이지만, 메들리 초반의 나른함이 갑자기 쉬 케임인 스루 더 배스룸 윈도우부터 환기되면서, 골든 슬럼버와 캐리댓 웨이트에서 고조되고, 디엔드의 앞부분에서 초조함과 진정이 뒤섞이다가 “and in the end, the love you take is equal to the love you made”를 외치고 모든 것을 거기서 끝내는 여정인데, 이곳 비스트로 애비로드에는 그에 대한 기색이 조금도 없다. 혹은 나와 생각이 다르다면, 적어도 히어컴즈더선이라도 내놓아야 마땅하다. 이곳은 일출로 유명한 동해안 속초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없다. 그러니까 이 식당은 동양의 작은 나라가, 대영제국의 세계적인 밴드가 내놓은, 가장 잘팔린 앨범의 표지사진을 걸어넣고, 그 앨범과 굳이 관련이 없는 비틀즈 소품을 내걸어놓고, 술을 팔긴 하는데, 16:00에 폐점을 하는 곳이다. 


너무 시니컬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곳 직원이 친절하지 않았다면, 더욱 신랄했을 것이다. 그 직원에게 구걸하듯이 잔 와인을 시켰는데, 그는 작은 와인잔의 반이 넘도록 떨어주었고, 나는 10분 안에 다 마셨다. 고마웠다.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휘청이니  The long and winding road와 lucy in the sky in the diamond 가 생각났지만, 두 곡 모두 애비로드에 담겨 있는 곡은 아니다. 그러고보니 이 카페를 술꾼이 디자인 한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애비로드는 술이 깨는 앨범이다. 서전페퍼나 매지컬 미스테리 투어로 했어야지. 물론 이것은 과한 참견이다. 이곳 호텔 프레지덴셜 스위트는 박정희 전용 룸이었다는데, 그렇다면 전성기가 적어도 40년 이상 지난 호텔이다. 여기에 15년 정도 더 보태고, 장소를 리버풀로 옮겨놓아서 좀 더 가꾸려는 노력은 존중할만하다. 다만 이십분만 앉아있을 수 있다는 사실때문에 아직도 씩씩거리는 것뿐이다.  


그리고 절에 다녀왔다. 신흥사. 별 기대없이 산책삼아 다녀왔는데 가는 길이 고즈넉하니 마음에 들었다. 사람이 거의 없었고 거대한 불상이 하나 있었다. 그 거대함을 사진으로 담으려하니 어떻게 해보아도 크기를 전달할 수 없었다. 크기는 어차피 상대적이 것이다. 저 부처가 보기에 나의 과오도 그정도 아니겠는가. 공간적으로 조금만 뒤로 물러나면 아이폰 화면에 1700미터를 담을 수 있는데, 시간적으로 영원의 관점에서 선다면 나의 허물은 있다고 보기도 어려울 정도일 것이다. 우주에서 보면 “Planet Earth is blue and there’s nothing I can do”라지 않던가. 그래서 좀 더 술을 많이 마시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술을 줄이고 더 부지런하게 사는 것과 별 차이 없는 것이다. 영원의 관점에서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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