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여행 / 에콰도르 바뇨스
작년 장기 여행자 일 때는 솔직히 꼬라지가 말도 모했끄든. 배낭가방에서 옷 꺼내 입을라카면 막 다 쭈굴쭈굴해가 말도 모해끄든. 양말도 냄새 한 번 맡아보고 아 오늘 또 신어도 되겠다 싶으면 또 신어. 머리카락은 아 관리가 안되잖아 그래서 바뇨스 동네 미용실 가서 만 오천 원짜리 파마를 했어. 머리가 꼬불꼬불하이 좋더라고. 매일 아침 8시 30분 가방 챙겨서 스페인어 학원을 가. 뭐 웃고 떠들고 눈치보다 보면 수업이 끝나거든. 그럼 점심시간이지. 집에 가서 볶음밥 해묵꼬 새끼손톱만큼 터지는 와이파이를 잡아 보겠다고 낑낑거리면서 오후를 보내. 저녁에는 동네 헬스장에서 줌바를 한다는 거라. 한 10~12명 있었던 것 같다. 줌바 수업은 우리에게 에스파뇰 복습하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오늘은 뭘 배웠냐고 물어보거든. 지금 생각해보면 기초적인 문장인데 목숨 걸고 더듬더듬 질문을 하는 거지.
- 이름은? 몇 살이야? 어디 살아? 너는 무슨 요일을 좋아해? 왜? 등등
억양이나 발음, 다른 단어들을 더 알려주기도 하고 그렇게 복습 시간이 끝나면 줌바가 시작하는데 아 한국 줌바 저리 가라지. 살사 기본 스텝에 엉덩이 털고 머리 털고 막 가슴 털고 난리도 아니지. 땀 한 바가지 흘리고 끝내면 내 정신도 다 털릴 정도. 헉헉 거리면서 숙소로 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잘생긴 오빠야들한테 인사도 한번씩 해주고. 씻고 삭 준비하고 이제 진짜 살사 추러 가는 거지.
현지에서 만난 얀델은 살사 선생님이었거든. 기본 스텝부터 하나하나씩 알려주는데 턴을 이렇게 돌다가는 땅까지 팔 수 있겠더라고. 아니, 나는 '살사' 하면 엄청 아름답고 우아하다고만 생각했지. 현실은 주머니에 휴지 넣어 다니면서 코에서 땀이 흐를 때까지 추다가 땀 한번 쓱 닦고 또 추는 거지. 클럽 골목에 3개의 클럽이 있는데 돌아다니면서 노래가 마음에 들면 여기 있다가 또 노래가 별로다 카면 또 앞에 있는 다른 클럽에 가서 놀고. 그러다 보면 새벽 2시쯤 되거든. 모든 클럽이 문을 닫으면 집에 가야 되는데 브라이언, 얀델이 또 다른 클럽엘 가자카는거야. 어데? 여 문 다 닫았는데 어델 가자고. 불이 다 꺼진 골목을 한참 따라가. 걸어가면서도 의심은 계속되는 거지. 그래도 여기는 위험한 남미에 여자 둘이니까. 아 진짜래. 진짜 클럽 가는 거래. 일단 믿고 가. 그렇게 걷다 보면 골목 끝에 큰 대문 하나가 보이거든. 똑똑하면 작은 문으로 얼굴을 확인하고 조용히 문을 열어주고는 몰라 뭐 앞도 안 보이는데 계단을 또 올라가라카대. 그렇게 딱 입구까지 올라가잖아? 진짜네. 진짜 살사 클럽이네. 문 열고 들어가면 2층 건물에 노래는 엄청 작게 틀어져 있고 동네에서 맨날 보는 친구들만 가득한 현지 비밀 클럽. 2층은 포켓볼 치는 곳도 있고 테이블에 앉아서 술 마시는 친구들도 있고 노래는 온통 살사 노래. 또 신나서 땅 파는 거지 (살사 춘다는 소리)
다음 날 낮에 브라이언, 얀델이랑 계곡엘 갔어. 걸어가다 보면 아보카도 나무가 있거든. 어디 있노 돌멩이 다 구해가지고 한두 개 따서 집에 가져가. 3~4일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 익으면 그때 다 같이 또 모여서 밥 해묵꼬 배부르면 쪼로로 모여가 영화 한 편 보면 또 줌바하러 갈 시간이야.
그렇게 한 달을 다니다 보니 동네 주민이 된 거라. 메르까도 시장에 밥을 먹으러 가면 줌바에 다니는 어머니가 계시고, 자주 가는 카페에 일하는 종업원은 또 헬스장 원장님 조카라고 하대. 길을 걷다가 지나가는 차에서 빵! 하는 소리에 돌아보면 유일한 남자 회원인 아저씨가 인사를 해주고 미용실에 머리를 하러 갔는데 거기서 일하는 남자는 헬스장에 복싱 선생님.
이렇게 이어지고 이어지는 관계가 참 신기하고 좋더라고. 쓰다 보니 길어졌는데 돌이켜보면 제일 좋았던 시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지. 세상을 시끄럽게 떠돌다가도 권태기라는 게 오면 무조건 작은 마을에 한 달 살기를 했는데 그 권태기가 이렇게 고마울 수 없다. 참말로. 지금은 멕시코에서 살고 있지만 비자가 끝나면 바뇨스 먼저 다녀와야겠다. 엘리자베스 선생님도 만나고 헬스장에 가서 줌바 수업도 듣고 밤이 되면 살사를 추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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