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쌓는 사람

'어떤 말'에 대해 쓰기

by 거짓말의 거짓말

"너 그렇게 벽을 치고 살다 간 아무도 못 만나게 될 걸."


그 말을 들은 것은 바로 지난주였다. 하지만 나는 그 이전에도 그 비슷한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상황도 다르고, 하는 사람도 달랐지만 맥락은 언제나 비슷했다. 이번에는 격주마다 한 번씩 만나서 영화, 음악, 추억 등을 주제로 2~3시간 동안 속 얘기를 하는 직장인 모임의 3회 차 뒤풀이 자리였다.


내게 그 말을 한 사람은 나보다 3~4살은 위인 결혼한 여성분으로 우리끼리는 '이사님'이라고 불렀다. 나이에 비해 빠른 승진을 해 한 홍보회사에서 이사 직함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님의 최근 취미는 퇴근 후 저녁에 직접 한 집밥을 먹는 것이었다. 요리가 취미인 이사님은 2주 전에 모임 멤버들을 초대했다. 그 주에 봐야 할 영화를 같이 보자고 제안하면 서다.


나와 다른 여성 멤버 2명이 갔다. 달큼한 간장 소스와 넙적 당면을 넣은 찜닭, 메추리알 꽈리고추 장조림, 깻잎 등 정갈한 한 상이 나왔다. 밥을 먹으며 막걸리와 한라산 소주도 마셨다. 모임 얘기로 시작해, 일 얘기, 결국에는 으레 그렇듯 연애 얘기로 넘어갔다. 이사님은 전일과 오늘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노느라 남편은 주말 동안 밖으로 낚시를 갔다고 했다. 나는 평소라면 잘하지 않았을 내 지난 얘기와 속 얘기를 꺼내놨다.


비공식 모임이었던 지난주 찜닭 번개를 제외하면 모임 멤버 간에 3번째로 보는 자리였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라는 영화를 보고 한 동안 실컷 이야기를 나눈 뒤에 뒤풀이로 합정역 인근의 지하 술집에 왔다. 오늘도 역시 모임, 직장, 으레 연애 코스였다. 세부 메뉴는 과거의 연인, 이상형, 연애 스타일 등이었다.


내 경우 앞의 두 항목에 대한 대답은 굉장히 단순하다. 과거의 연인은 1명 혹은 2명, 이상형은 밝은 사람이다. 1명 혹은 2명인 이유는 후자의 1명을 포함해도 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역시나 상대에게 '과거의 연인에 너를 포함해도 될까?'라고 물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사실 이상형은 딱히 없지만 누가 물어볼 것에 대비해 밝은 사람으로 정해 두었다. 어렸을 적에는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이상형이었다. 사실 단발머리가 이상형이라기보다는 처음으로 좋아한 여자애가 단발머리였을 뿐인지도 모른다.


반면 내 연애 스타일에 대한 설명은 매우 복잡했다. 이것은 실제로 내 연애 스타일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연애 다운 연애를 별로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내 연애 스타일을 잘 모른다. 가끔은 집 밖에 안 나가고 연인과 침대에서 2박 3일 동안 뒹굴거리고만 싶기도 하다가도, 어떤 때는 연인과 자전거를 타거나 마라톤을 함께 뛰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한 설명은 언제나 복잡하고, 잘 아는 것에 대한 설명은 언제나 간단명료하다.


연애 스타일까지는 아니지만 이성을 만나거나 살아가면서 깨닫게 된 한 가지 전제는 있다. 바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머리 길이나 행동 패턴 등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결혼을 앞둔 연인이라면 '이 사람이 나로 인해 바뀔 수 있다'라는 희망을 품기보다는 '이 사람의 바뀌지 않을 가장 나쁜 점도 내가 이해할 수 있는가' 묻는 편이 낫다. 치약을 중간부터 짜는 사람의 본질은 치약을 중간부터 짜는 것이다. 설령 그가 신혼기간에 밑에서부터 치약을 짠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중간부터 짤 것이다. 설령 변하지 않았다면 그는 상대방을 위해 그만큼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혹시나 둘 사이가 나빠 이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마음속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치약을 밑에서부터 짜느라 신물이 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녀 관계에서의 첫인상이 바뀐 적이 거의 없다. 처음 호감이었던 사람은 그 후에 그 사람의 단점이 드러나도 한참을 더 지켜보게 된다. 반면 첫인상에 호감이 없던 사람에게는 시간이 흘러도 갑자기 호감이 생기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남녀 관계로서 이성을 만나게 되면 내 무의식이 '호감 존(zone)'과 '무관심 존(zone)'으로 분류하게 되는 것 같다. '같다'라는 표현을 쓴 것도 무의식이 하는 일이라 내가 의식적으로 한 적이 없고 실제로도 확신할 순 없지만 느낌적으로 그런 것 같기 때문이다. 어떤 계기를 통해 호감 존의 수면 저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사람이 돌연 떠오르는 경우는 있지만 무관심 존에 있던 사람이 호감 존으로 이사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소개팅을 하고 처음에 호감이 생기지 않으면 애프터를 하지 않는다. 매우 드물긴 하지만 무관심 존의 사람이 내게 이성적 관심을 보여주더라도 대체로 무시하거나 일절 응답하지 않는다. 짝사랑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혹시 만나다가 좋게 되지 않을까'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상대의 호감으로 게임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에 이사님이 내게 말했다.


"너 그렇게 벽을 치고 살다 간 아무도 못 만나게 될 걸. 너에게 먼저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보는 게 어때?"


나도 알고 있다. 이렇게 벽을 쌓고 살다가는 나는 어쩌면 평생 외톨이가 될지도 모른다. 아직은 그래도 에너지가 남아 있어 두꺼운 문을 열고 '익살의 가면'을 쓴 채로 외출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돌아온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벽에 이끼가 끼고 풀이 자라고 문 앞을 덮어 버리면 그때는 정말로 아무도 이곳에 문이 있다는 걸 모를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벽에 낀 이끼를 제거하고, 문 앞으로 난 작은 샛골목을 청소하고, 문에 걸어둔 자물쇠를 제거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물론 나도 알고는 있다. 그렇게 하는 게 정답이라는 걸.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걸. 그리고 그 방법도 가능성을 아주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최소한의 필수 조건이라는 걸. 하지만 어쩐지 나는 그게 잘 안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2020.06.13 쓰담 클래스 7기 둘째 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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