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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Jul 10. 2023

실루엣 by 시마모토 리오

<실루엣> 


15p

그렇게 말하고 칸은 보리차를 마셨다. 목에다 벌레라도 키우는 것처럼 목 피부가 꿈틀거렸다. 속이 비칠 듯 하얀 피부였다. 건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고급한 것이다. 불순물이 전혀 없는 하양. 나는 그의 몸에서 목이 가장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28p

딱 한 번, 칸을 좋아한다는 여자애가 자기 친구들을 데리고 나를 찾아와, 그와 헤어졌다는 소문이 정말인지 확인하려고 했다. 내가 정말이라고 확인시켜 주자, 그녀는 기뻐하며 돌아갔다. 

풍선이 두 개밖에 들어가지 않는 상자가 있는데, 하나가 터졌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들어갈 수 있겠다고 믿는 그녀들의 태도. 나는 도무지 의문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가령 파란 풍선이 터졌는데 그 다음에 온 풍선이 노란색이라면, 남은 풍선이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41p

"나, 지금까지 타인에게 맞추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하기 어려운 일이 많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었는데, 좋아하는 사람에게 맞추는 건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네, 오히려 즐거워." 


44p

칸의 엄마는 그 후에도 바람을 피웠고, 아버지 역시 보란듯이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 절망에 모두 길들어 버렸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상황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은 채, 칸의 상처는 소리 없이 깊어 갔다. 

모두가 너덜너덜하도록 지쳐 있었다. 격렬한 말다툼 끝에 아버지가 엄마를 찌르고 도망갔다. 

그렇게 칸은 또 소중한 무언가를 결정적으로 잃고 말았다.


45p

나는 왜 손을 잡는 것조차 싫어하느냐고 열여섯 번 물었다. 

그리고 열일곱 번째, 시무룩해진 그가 내게 겨우겨우 들려준 얘기다. 그 세월 속에서, 하고 그는 말을 꺼냈다. 

"사람을 만지고 싶다는 자연스런 욕구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말았어. 그리고 솔직히, 여자 몸에는 혐오감을 느껴. 엄마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내가 아는 엄마하고는 다른 냄새가 났거든. 


46p

다만, 그는 내 육체까지는 사랑하지 못했다. 하지만 연인인 그가 나의 알맹이뿐만 아니라 그릇까지 사랑해 주지 않는다면, 다른 어느 누가 나의 그릇을 사랑해 줄까. 


50p

"왜 상처가 난 순간보다 나중에 점점 아파지는지 모르겠어." (중략)

"다친 순간에만 아프면, 아무리 큰 상처를 입어도 다들 치료까지 해 가면서 낫게 하려고 애쓰지 않겠지. 상처가 점점 아파지니까 그걸 못 참아서 열심히 고치는 거 아니겠어." 


60p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찻집은 역에서 너무 멀어 휴일에도 손님이 거의 없다. 더구나 점장이 매사 대충대충 하는 스타일이라, 점원 사이에서는 쾌적한 일터로 은밀한 사랑을 받고 있다. 


76p

나는 밤을 무시하는 편의점의 밝음을 좋아한다. 아무리 짙은 어둠도 아랑곳하지 않고 휘황한 밝음을 뿜어낸다. 


82p

긍정이든 부정이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다만, 나의 솔직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주저했다, 지금 이자리에서 한 말은 절대 내 안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생각한 끝에 "모르겠어"라고만 대답했다. 


83p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한 마디에 가슴이 믹서 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과일처럼 조각나 버렸다. 


86p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지금까지는 짧게만 여겼던 하루가 의외로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령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보면 정적에 휩싸인 밤이 한없이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서글픈 해방감이었다. 나는 셋짱과 함께였던 때의 부자연스러움을 오히려 행복하게 여겼다. 나는 칸과 헤어진 후에도 여전히 칸을 그리워했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셋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마신 물이 온몸으로 스미듯 내 몸에 스며들어 있었다는 것을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식물들의 호흡> 


109p

몇 번이나 결혼에 실패한 바람에 톡톡히 공부를 했다는 엄마 같으면, 지금의 이런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엄마가 말했잖아. 연애 같은 골치 아픈 거에 말려들지 말라고. 

나도 좋아서 말려든 게 아니다. 

다만, 세포 하나하나가 마치 간지러워 긁어 달라는 듯 그의 뼈가 불거진 팔과, 입보다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눈을 원한다. 마치 그것들이 전에는 내 몸의 일부였기라도 하듯. 


<작가 후기>

지금, 내가 소설을 쓰면서 가장 쓰고 싶었던 것은 오래도록 홀로 지켜 왔던 마음에 타인이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의 감각과 기분이었다고 생각한다. 타인을 받아들이면서 느끼는 위화감과 저항감, 그리고 받아들인 후에 태어나는 새로운 감정을. 

혼자라는 것은 참 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지나치게 기대한 탓에 느끼는 실망도 없고, 자신을 부정당하는 일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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