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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Jun 14. 2022

불편한 무리짓기

무리를 지어야 편한 게 인간이라지만

김미경 선생님의 유튜브 중에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다.

나는 회사에서 무리 짓는 직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리를 짓는다는 건 바꿔서 말하면 자기 무리 밖의 사람들에게는 배타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무리 짓는 직원들이 오래갈 직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이 말의 요지에 나는 무릎을 탁 치고 동의했다. 하지만 내가 만난 현실은 달랐다. 무리를 잘 짓는 사람들이 오래가고, 고인물이 되어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예전에 같이 근무했었던 역장님께서 지금 근무하는 역의 역장님으로 발령받아 오시게 되었다. 부역장님 조에서 근무하는 나는 역장님과 다시 근무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 역의 역장님으로 다시 뵙게 되어 반가웠다. 역장님 조에 근무하는 과장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분 FM이라면서"


"FM으로 일도 열심히 하시고 좋으신 분이세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면에서 완벽하기만 할까. 그래도 역장님은 좋은 분이셨다.


"너희 부역장님은 일 잘하시지?"


"네 일도 열심히 하시고 참 좋으세요." 나는 또 대답했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면에서 완벽하기만 하겠냐만은, 그래도 부역장님은 분명 좋은 분이셨다. 역장님처럼 리더십이 있지도 않고, 현장 경험이 부족해 현장에 대해 아는 것이 적었지만 처음 부역장 일을 시작하는 분들이 다 그렇듯 업무에 성실하게 임하셨다. 원래 OO역에 갔어야 됐는데 우리역에 왔다는 푸념을 자주 하시긴 했지만 그건 소문내서 좋을 말이 아니었기에 나 혼자 듣고 삼켰다.


"너희조 역무원은 좀 기가 세 보이던데 괜찮아?"

과장님은 우리 조 직원 한 명 한 명의 평판을 돌아가며 내게 물었다.


"일도 잘하고, 좋아요. 제가 신경 쓰고 도울 일이 없을 정도예요." 강약약강인 친구이긴 했지만, 같은 직급이고 선배인 나에게는 강도 약도 아닌 친구여서 나쁜 친구는 아니었다.


현장에서 이만한 역장님, 부역장님, 역무원을 만나 일하는 게 어딘가.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평범한 사람의 범주벗어난 몇몇의 어마어마한 사람도 겪은 나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원치 않게 닮아갔다. 10년이면, 나도 그런 괴물이 되지 않으라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과 최대한 닮아가지 않는 방법, 그들과 '무리 짓지 않기'를 선택하는 게 나의 처세였다. 이상적이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리석은 처세.




"휴 O조 부역장 또 연차야!? 저번에는 병가 쓰고, 이번에는 연차 쓰고, 다음 근무도 연차고. 일을 하겠다는 거야 뭐야."

우리 조 부역장님은 다른 조의 부역장님들이 일을 미루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다. 출근 후에 한 번, 퇴근 전에 한 번, 근무 중에 한 번, 시간 날 때 한 번, 벽에 걸린 근무 달력을 확인했다. 그리고 달력을 본 후엔 종종 O조 부역장은 회사를 다닐 의지가 없어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아유. 부역장님만 이렇게 힘들게 일하셔서 어떻게 해요~ O조 부역장님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네."

역무원은 부역장을 위로하며 부역장의 업무들을 최대한 나누어서 열심히 하곤 했다. 사실 현장에서 보는 흔한 모습인지라 처음에 나는 그냥 이 말들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부역장님이 식사를 하러 간 사이에도 역무원은 나에게 말했다. 부역장님이 너무 일을 떠맡으셔서 이 역에 있기 싫어하고, 그래서 떠나실까 걱정된다고.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부역장님이 나이도 어리시고 초임이니 다른 부역장님들은 우리 부역장님이 일을 다 하려니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근데, 제가 다른 역에서 교대 아닌 일근으로 근무하면서 각 조 부역장님들과 다 근무해봤거든요? 근데 모든 조 부역장님들이 똑같이 말하긴 했어요. ㅎㅎ
다들 자기만 일한다고. 그렇긴 한데. 우리 부역장님이 고생하는 게 사실이긴 하죠."


우리 부역장님은 열차를 타시는 분과도, 본사에 계시는 분과도, 다른 역에 근무하시는 분과도 서로 근무지를 바꿀 수 없는지를 이야기하며 바쁘게 다니셨다. 처음에는 현장 실정도 모르고 훨씬 힘든 역과 자리를 바꾸려고 하길래, 안쓰러운 마음에 붙잡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러나 듣기 좋은 말도 한두번이지 상사가 항상 고민만 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답답한 일이었다.


부역장님의 하소연을 듣는 것에 지쳐있던 난, 나의 하소연을 해보기로 했다. 부역장님께 나의 업무적인 고민도 털어놨다.

현장에서 반복적인 업무를 하며 발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 발전을 위해 직무 교육을 신청했지만 나의 동기는 선발이 되어 교육을 받고 나는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 외국어 회화 교육은 교육생으로 선발이 되었을지 기대도 되지 않는 것 등.


본사에 계셨던 분의 대답은 다를 줄 알았지만 별다를 것이 없었다. 좋은 교육은 본사 직원들이 다 선점한다. 현장에서 편하게 근무하는 것도 (좋은 교육 기회를 본사 직원이 선점한다는) 그런 걸 다 감수하고 하는 것 아닌가, 라는 내용이었다.


"음. 그럼 본부 가시는 건 어때요? 근데 경영인사처는, 아줌마 직원들이 퇴직할 때까지 좋은 자리는 안 놓아줄 거라. 괜찮은 업무 맡기는 어차피 힘들 것 같고."

이미 고인 물을 헤치고 가는 건 어렵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민원처리 업무부터 맡으면서 좀 버티면 자리가 하나씩 날거라는 말도. 다 아는 내용이었다. 도움이 되는 조언은 듣지 못했지만, 그냥 하소연이라도 한 것에 의의를 뒀다. '부역장님만 힘드신 것은 아니에요.'라는 마음의 하소연.





"역장님 퇴직하시면 저 역장님 조에서 오라고 하네요.ㅎㅎ"

부역장은 뿌듯한 표정으로 역장님 조에서 자신을 원한다는 말을 전했다. 자신도 그 조로 갈 마음이 있다는 의미였다.


"역장님 조면 새로운 역장님이 그 자리에 오시지 않아요? 부역장님이 역장님 조로 가셔도 돼요?"


"그거야 역장님이 동의하시면, 다른 조로 역장님이 가시면 역장님 조가 되는 거니까요. 상관없어요."


역장님 조 과장님과 대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너희 부역장님은 일 잘하시지?"






역장님 조는 역장님이 30분 안에 점심을 드시고, 한 시간의 점심시간이 보장되지 않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역장님과 같이 1년 정도를 근무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예상한 일이었다. 예전의 나도 점심시간엔 음식을 포장해와서 역장님과 함께 먹었고, 양치만 한 뒤 다시 자리에 앉아서 근무를 계속했었다.


"역장님과 근무하면 점심시간이 30분이에요. 하지만 그거 빼곤 다 좋으세요. 역장님 좋으세요."

부역장님이 역장님에 대해 물었을 때 나 역시 이렇게 대답하곤 했었다.


어쨌든 역장님 조는 그동안 근무한 역장님들의 식사 스타일에 불만이 쌓였고, 우리 조 부역장을 데려가서 부역장 조가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부역장도 싫어하지 않는 눈치일 수밖에 없는 게, 부역장까지 셋이 아주머니들끼리 같은 조가 되면 비슷한 사람들끼리 수다 꽃도 피울 수 있고, 내가 생각해도 너무 재미있을 것 같은 그림이었다.

 




스크린도어 경보음이 울렸다. 껐다 켰다 해 보아도 경보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업체가 올 때까지 계속 울리면 안 되는데...... 걱정이다. 곁에 있는 부역장과 역무원은 조치 방법을 알 리가 없었다. 내가 모르면 그들도 알 턱이 없다. 마침 교대하러 출근한 역장님이 UPS실 전원은 껐다가 켜 보았냐고 여쭤보셨다.


"와. 역장님! 그런 것도 배우셨어요? 그건 몰라서요, 아직 안 해보았어요!"

나는 기뻐하며 역장님께 물었다. 역장님은 직원들을 데리고 가서, 직접 전원을 리셋하여 경보가 울리지 않도록 조치를 끝내 주셨다.






친구와 한잔 하며 나는 말했다.

"나는 누구랑 근무해도 상관없어. 다 똑같아."


하지만 여러 일들을 겪고 보니 그 말도 반은 틀린 것 같다. 여기저기 무리 짓기 바쁜 사람들 속,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편한 소속이 없을까 알아보는 모두의 속에서 나는 힘없이 생각했다. 알고 보면 나는 모르는 대단한 곳이 있어서 다들 그렇게 노심초사 난리인 것은 아닐까 하고.


그냥 내가 역장님 조로 간다고 하고 역장님 조의 과장님과 자리를 바꿔주면, 해결되는 것 아닌가?

그럼 그들 입맛에도 맞고

그 누구랑 근무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 나에게도 맞는데 말이다.


하지만 근무 조의 스케줄에 맞춰 이미 예약해둔 많은 소중한 일들, 그리고 대학 병원 진료 예약을 다 바꾸어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내가 진정 바꾸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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