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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Jun 20. 2022

여직원과 공기업

맞벌이는 필수지만, 여직원은 싫어요.

-차장님, 저도 임신하고 싶어요.

시집도 안 간 노처녀 직원인 나의 되바라진 푸념이었다. 나의 처지와 배경을 잘 아는 차장님은 말씀하셨다.


-그래. 우리 회사는 임신했을 때만 좋아. 그 외에는 평생을 굴려먹기만 하다가.

그렇다. 적성에도 안 맞는 업무를 해야 하는 공기업에서 병을 얻어 가면서까지 내가 버티고 있는 이유 중 1순위가 바로 이것이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도 회사를 다니려고 공기업 입사했는데,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못 낳았네요. 괜히 공기업 왔어요.

결혼 못한 노처녀의 흔한 자격지심 인지도 모른다. 결혼을 생각했던 남자 친구가 물었었다.


-정말 월급이 그거밖에 안 돼? 너희 회사 우리나라에서 모르는 사람 없잖아.

나는 조용히 월급 명세서를 핸드폰 사진으로 찍어 남자 친구 핸드폰으로 전송했다. 남자 친구도 공공기관에 다녔다. 같은 회사는 아니었지만, 월급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결혼 후 맞벌이는 필수였다.


-공공기관은 남자 여자 모두 육아휴직이 보장되니까, 오빠랑 나랑 돌아가면서 육아휴직하면서 아이 키우면 되겠다. 그렇지?

남자 친구는 대답을 망설이더니 말했다. 공공기관에 다닌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 조직 육아휴직한 남자 직원에게 암암리에 불이익을  이야기였다. 슬펐다.

-그래도 공공기관인데 육아휴직 쓴다고 자르지는 않지 않겠어?

-그러지야 않지. 그런데 복직했을 때, 엉뚱한 곳으로 지방 발령이 날 수도 있어.

(그리고 자신은 회사 생활 중 원치 않는 지방 발령이 났을때 그 곳에 가지 않기 위해 육아휴직을 쓰고 싶다고 했다.)


남자 친구와 헤어진 이후의 나는, 취집 하고 싶다는, 요즘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내 주변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했다.

-안 돼. 요즘 세상에 맞벌이는 필수야.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이를 셋은 가지고 싶다던 전 남자 친구를 떠올린다. 맞벌이를 필수로 해야 하는 세상은 왔지만, 육아휴직을 돌아가면서 하기에는 어려운 세상도 떠올린다.




공기업에서 다년간 근무하면서 나는 오히려 '지켜야 할 커리어' 같은 게 우리 회사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으로서 경력 단절이 싫어 공기업에 입사하는 것이라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난 출산하고 육아휴직하기 싫은데? 애는 여자가 낳지만 육아는 남편이 해도 되잖아? 난 내 일이 좋고 일에서 뒤처지는 게 싫어. 여자가 무조건 육아휴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솔직히 난 회사에 육아휴직이 있어도, 복직이 보장되어도 쓰기 싫어. 일이 더 좋아.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는 친한 언니의 말이었다. 오히려 지켜야 할 커리어는 그 곳에 있었다. 커리어를 지켜야 한다는 말은 '그 일을 사랑한다'는 명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일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너무 많은 이유가 있지만 열심히 일했던 것에 큰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리라.






-화장실에도 못 가고 근무할 정도로 종합안내에 인원이 부족해요. 동료가 옆에서 악성 민원인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는데도, 옆 자리에서 도와줄 시간이 없을 정도예요.

부역장님과 팀장님께 종합안내 직원을 꾸 다른 업무로 빼서 않았으면 하는 건의를 했다. 조직의 '인원 부족' 문제가 본질인 이야기였는데, 부역장님께 나는 본질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옛날 매표 여직원들은 생리대 갈 시간도 없었다. 여직원들이 생리대가 푹 젖어도 갈지 못하고 일했다고 하더라~로 시작하는 긴 설교였다. 그거에 비하면 요즘 매표 여직원들의 사정은 좋아진 것이란다. 그러다 이야기는 불만 많은 '여직원'의 문제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을 계기로 나는 조직의 문제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이어가고 싶은 커리어'와, '돌아오고 싶은 조직'은 그 이후의 많은 경험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도 국민의 의무인 국방의 의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성도 군 복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 시절 토론 동아리에서 내가 했던 <여성의 군 복무 문제> 발제였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뒤 나는 독서모임에서 똑같은 이야기를 한 번 더 하게 되었다.

하지만 10년의 세월도 바꾸어 놓지 못한 강산이 있었다.


경제가 어려우니 맞벌이는 필수지.

경제가 어려우니 여성도 군대에 갑시다.


만약 이런 경제의 논리로 여성의 군 복무 문제를 설득했다면 세상은 바뀌었을까? 나는 회사라는 조직부터 떠올린다. 조직의 문제에 대한 발언을 했을 때, 발언을 한 내가 하필 여성인지라 그 문제가 '여직원의 문제'로 치부되었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리고 나는 '취집이나 할래요'라는 생각 없는 발언을 하는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다. 진지한 말을 어렵게 꺼냈을 때, 돌아오는 이야기에 상처받는 것보다는 생각없는 여자로 살아가는게 편하니까. 비겁하지만 그렇다.


 나는 맞벌이는 필수인 세상에 사는, 회사에서는 침묵해야 하는 '여직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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