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노는
어떤 기억들이 있다. 모멸을 삼키는 기억. 미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말을 듣는 기억. 의미는 모르지만 적의만은 똑똑히 알 수 있는 말들. 마른침을 성급히 삼키는 기억. 기도로 일부 튀어 들어간 침에 기침이 나올 것 같은 기억.
사레들린 숨을 참는다. 사람이 정말 공포스러우면 기침도 숨길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건 배우지 않는 쪽이 좋았을까? 기왕이면 어릴 때부터 연마해서 능숙해지는 쪽이 좋았을까?
어린이는 탈출하고 싶다. 그러지 못한다. 어린이기 때문에. 꼭 어린이를 향해 날아오는 말이 아니어도 어린이는 공격당한 동물처럼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어린이에게도 적의 서린 말들이 성큼 손가락을 겨눈다. 그게 언제부터였지?
너무 무서운 나머지 화가 난다. 어른 1이 나가버리면 남은 어른은 어린이에게 가혹해졌다. 주눅이 들어 밥을 먹다가 한 숟가락을 흘렸다. 난폭한 얼굴로 행주를 던지는 증오스러운 얼굴. 그는 끊임없이 화를 내다가 사죄하다가 또 화를 냈다.
반복. 어른이 된 어린이는 너무 지겨운 나머지 화가 난다.
고여서 썩는다
어른이 됐다.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어린이 때처럼 때때로, 아니 자주, 시큰거리는 눈의 눈꺼풀을 꾹 눌렀다. 그러면 눈물이 감춰졌다. 어렵지 않았다. 마치 기침을 가렸던 것처럼.
어느 날의 기억이 어린이 때의 기억과 나란히 놓여 있다. 행주를 던졌던 증오의 얼굴 앞에 그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욕을 했던 기억. 만류하는 어른 1에게 당신도 더럽고 비겁한 방관자라고 악을 내질렀던 기억. 그날 어린이는 사과를 받았다만 이겼다고 볼 수 있나? 글쎄, 완패가 아닐까.
어른들은, 한 어른이 다른 어른을 용서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군다. 알지 못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다. 용서하려는 마음은 기고만장한 얼굴에 놀랄 만큼 신속히 망가진다.
훼손된 마음은 애써 무시하고 외면한 분노에 불씨를 붙인다. 세상을 멸망시켜도 멈출 수 없을 것처럼 오래도록 타오른다. 이 마음이 불이 아니라 물이라면 썩을 대로 썩어 파리도 알을 까지 않는 물일 것이다.
어른이 된 어린이는 치가 떨린다. 아무리 애써도 달라지지 않는다.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이해를 강요한다. 젊은 네가 늙은이를 이해해야지. 그런데 그때 너도 잘못했잖아. 내가 그랬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행주를 던지고 같이 죽자고 고함치는 자신의 얼굴을 정말로 까먹은 것 같은 얼굴. 살의를 느낀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할 줄 아는 게 많아지고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도, 문득문득 드는 살의는 지워지지 않는다. 푹 꺼진 눈으로 자신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것 같은 살의에 어린이는 두렵고, 증오스럽고,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