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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밈혜윤 Oct 11. 2024

내 이름을 잊어줘

스토킹, 놓여날 수 없는 기억

   Min 또는 윤

   언제부턴가 이름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Min 또는 윤을 댔다. 친하지 않고 앞으로도 친할 일이 없는 사람과 대화할 때. You can just call me Min. 전화 영어를 할 때마다 수화기 너머의 외국인에게는 Min을 말한다. 경험상 외국인들은 ‘윤’ 발음에 서툴러서 몇 번이고 이름을 불러주어야 한다.


   윤이라고 불러 주세요.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발음할 줄 아는 한국인들에게는 윤을 댔다. 같은 문화에서 자라난 한국인들조차 되묻는다. 이름이 외자예요? 그런 건 아닌데, 우리가 친구가 될 것 같지는 않으니. 당연히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아뇨. 그냥 어릴 때 윤이라고 불렸어요.


   친해질 생각도 앞으로 친해질 일도 없으면서 우리는 왜 낯선 타인과 대화를 할까. 낯선 사람과 일회성 친목에 익숙해진다. 게스트하우스 파티에서 본 사람이든, 친구의 친구든, 단골 위스키바의 또 다른 단골이든. 낯선 사람을 만날 곳은 많다. 때로는 그쪽이 더 편하다. 지속을 기대하지 않는 관계는 그만큼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산뜻하다.


   Min이나 윤을 댈 때마다 또 생각한다. 왜 이름의 가운뎃글자는 불러주지 않게 될까? 혜. 받침이 없어서인지 불완전하게 느껴진다. 아마 동음이의어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되물을 것이다. 아이? 햇빛 할 때 해? 고개를 모로 저으며 아뇨, 여이에요, 해야겠지.   


   이름이 흔한 이름은 아니다. 혜윤이라는 이름은 많지만 성씨가 합쳐지면 조금 특이해진다. 엄청 흔치는 않은 이름이라 좋아하지만 동시에 많이 특이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름을 좋아했기 때문에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잘해줬다. Min 또는 윤 뒤로 숨기 시작한 건 그 일이 있고부터다.


   그 일

   스토킹을 당했다. 그 사람은 내 집주소를 몰랐고 때문에 집에 찾아오거나 물건을 보내는 일은 없었다. 다만, 문자를 계속해서 보냈다. 어느 날엔 애원하고 어느 날엔 고백하며 갈구했다. 어느 날엔, 수가 틀렸는지 자신에게 있는 ’대화 녹음본‘으로 고소하겠다고 했다. 네가 고함치고 막말한 것 고소할 거야.


   그런 식으로 얘기하시는 거 불편해요,라는 말이 막말이라면. 그리고 막말이라는 이유로 고소할 수 있는 거라면. 나는 살면서 만났던 사람 중에 몇을 고소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핸드폰으로는 차단했는데 스마트워치로 그 사람의 문자가 자꾸 알림이 떴다. 피가 말라가는 느낌.


   애원하고 갈구하고 증오하고의 주기는 매우 짧았다. 때로는 며칠, 어느 날엔 몇 시간. 스토킹은 더욱 강한 처벌과 예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과 나는 서로의 집주소를 몰랐지만 어쩌다 어느 밥집 겸 술집 앞에서 마주쳐도 놀라울 게 없는 생활 반경을 갖고 있었다. 그 사람은 소심한 사람이었지만, 혹시라도 마주치면 나를 위해할까 봐 겁이 났다. 나는 살고 싶은지는 몰라도 죽고 싶지는 않았다.


   징-. 스마트워치에서 문자 알림을 꺼놨는데도 자꾸 진동이 느껴졌다. 보고 싶지 않은데 문자함을 열어 그 사람이 또 문자를 보내진 않았는지 병적으로 확인했다. 간혹 KB star 등의 문자면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느 날 나는 워치를 충전하지 않았다. 반년 정도 더. 반년 후에는 동생에게 켜서 리셋을 해달라고 했다.


   다시 켜본 워치에는 더 이상 알림도 문자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 사람으로부터 놓여났다. 하지만 다시 문자함에 들어가서 확인을 해야 하지 않을까? SNS에 또 내 초성을 쓰며 거짓글을 거듭 쓰진 않았을까? ㅁㅎㅇ은 분노조절장애자, 대화하다가 갑자기 고함 빽 지르고 막말하는 미친년, 자기를 스토킹하는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하는 정신병자.


   그 사람은 자기가 한 행동들을 내가 한 것처럼 뒤집어 씌워서 거짓글을 계속 ‘끌올’했다. 나는 대응할 수 없었다. 지켜볼 수조차 없었다. 명치 안쪽부터 내장을 뾰족이 찔러오는 고통과 숨을 쉴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포기했다. 어쩌면 그 뒤로 내 이름도 반쯤 포기한 걸지도 모르지. 고통스럽다.


   무엇이? 반토막이 된 내 이름이? 아니면 그때 기억이? 그도 아니면. 그 사람에게 오해할 만한 여지를 내가 줬던 건 아닌지 스스로 검열하고 검증하려 들었던 것? 알고 싶지 않다. 무엇이 제일 고통스러운지 줄 세운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그가 나를 완전히 잊어버렸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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