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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크리스마스 마켓, Y와 친구들

언젠가 다녀왔지 독일

by 밈혜윤

1. 기내식

잠들어 혼곤한 와중에도 밥 나눠주는 소리가 들리면 귀신 같이 잠은 달아났다. 첫 기내식 비프쌈밥을 열어 달게 먹으려던 때… 내 옆사람은, 비프쌈밥의 준비된 수량이 소진되었단 말에 신경질적으로 스텝밀이라도 달라고 했다. 응대 승무원은 자기 것을 드리겠다고 했다. 내 것 뚜껑을 닫고 옆사람에게 줬다. 다시 치킨커리를 받았다.


스텝밀이라도 내놓아라. 그게 소비자로서 요구할 수 있는 권리라면 권리겠지만..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난 쌈밥이 대단히 먹고 싶진 않았으므로 양보했다. 그 뒤로 그는 자꾸 내게 말을 걸었다. 대단히 불편했다. 권리를 빌미 삼아 조금의 양해도 타협도 없이 너의 것이라도 받겠다는 태도가 당연한 사람은 글쎄.. 결이 맞진 않는다.


2. 크리스마스 마켓, Y, 독일 맥주

독일행의 목적은 딱 세 가지였는데, 정말 Y 말대로 독일 구석구석에는 온갖 크리스마스 마켓이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다소 유난이기까지 한 분위기는 즐겁고 귀엽다. 뭐든지 조금 유난 떨어서 나쁠 건 없다. 특히 좋은 일은 유난을 마구 떨어야.


쾰른 대성당에서 Y 씨는 나를 위해 돈을 내고 초를 사줬다. 소원을 빌고 불을 붙이면서 역시 ‘프라우 리’는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아가씨 생각했고 그런 그녀에게 장단을 맞춰 진지하게 소원을 빌었다. 우리의 소소하고 우연한 즐거움을 빌었다. 화답하듯 여행은 매우 즐거웠다


3. 시간표

독일 버스 정류장과 기차 역사에는 종이로 시간표가 살뜰히 붙어 있다. 그런데 연착이 심해서 아무 의미 없다고 한다… 카테고리화하고 공문서 작성하기 좋아하는 독일이 참 별 일이다. 연착이 너무 심해서 의미는 없지만 암튼 이렇게 운행할 의도는 있었어~의 자기표현? 다짐?


비록 지켜지지 않는 다짐에 불과해도 자기표현과 표명은 중요하지. 거시적인 방향성을 잃지 않는 것은 매우 매우 중요하니까. 근데 그게 기차가 그러면 되는 거냐고; 싶긴 해


4. 쾰른 성당

분명히 수년 전 가족끼리 떠났던 유럽 패키지여행에서 쾰른 성당을 들러 설명도 들었는데 그런 건 싹 까먹고 뒤에 맥도날드가 있었다는 기억만 남았다. Y와 다시 찾아서는 이 성당의 경비가 되면 밤에 으스스할 것 같다는 신소리를 나눴다.


쾰른 성당이 폭격으로 까매졌다는, 구글을 뒤적거리면 나오는 얘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우리는, 만약에 여기 경비가 되면… 귀신 소리가 나면… 이런 이야기로 숨을 쉬니까.


5. 길빵

독일 사람들은 길빵을 정말 많이 한다! 길에서 빵 먹기도 많이 하고 길에서 흡연도 정말 정말 많이 함.


어릴 때 걸어 다니면서 뭐 먹지 말라고 혼나던 민혜윤 어린이는 석열 에이지 32세에 처음으로 맘 편히 길을 걸어 다니면서 빵을 먹었다. 매콤 새콤한 소스와 야채와 고기는 맛있었고 요상한 자유로움은 달큰했다.


근데 길에서 흡연하니 말인데, 기차역 승강장 끄트머리에 흡연존이 있다. 대박 문화 충격.


6. 유학생 체험

독일에서 만난 Y와 Y의 유학생 친구들은 따뜻하고 상냥하게 이방인을 맞아줬다. 그들의 집에서 음식을 얻어먹고 냥이를 구경하고 웃고 떠드는 시간은 짧았지만 마음에 분명 어떠한 흔적을 남겼다.


내가 유학을 왔다면 이런 일상을 보냈을까? 싶은 시간은… 나는 타국의 삶을 사랑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간단한 답을 얻게 만들었고 한국의 삶에 더욱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을 추후에 보다 자세히 글로 남겨야겠다.


7. 고통

Y의 방에서 까불다가 발바닥에 아주 작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유리조각이 박혔다. 발바닥 이슈로 독일 헬스장 원정은 수포로 돌아갔다. 전날 운동복도 사고 루틴도 짜놓은 헬린이는 가슴이 몹시 아팠어요.


그 유리조각은 부피로만 따지면 내 몸통 부피의 1% 아니 0.1%도 채 안 될 텐데 제법 아팠다. 그 쪼꼬만 것 때문에 흔들리는 기차에서 발을 딛고 있기가 힘들었다. 내 삶을 혹독히 넘어트리는 것은 커다란 우박덩이이기도,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작은 조각이기도. 그리고 때로는 우박보다 아주 작은 파편이 더 아플 때가 있기도.


7. 돌아가는 길

독일의 마지막 만찬은 Y의 집에서 먹은 신라면. 끝내줬다. 유학생들이 독일다운 것을 먹어야 하지 않냐고 거듭 물어왔으나 나는 충분히 충분히 좋았다.


두고 가야 하는 아쉬움과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도감. 기나긴 귀갓길에 대한 우려와, 동시에 꿈결 같은 비행을 마치고 내려서 마주하게 될 익숙한 냄새에 대한 기대. 모든 게 완벽했다.


그리고 난 기내식으로 주는 밍밍한 커피가 그리 맛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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