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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ssical Dec 16. 2016

인물탐구: 잊혀진 독립운동가, 여운형

- 몽양 여운형의 생애를 따라서

“1947년 7월 19일, 2발의 총성이 울렸다. 집으로 향하고 있던 남성은 총상을 입은 채로 피를 흘리고 있었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병원으로 이송되던 도중 결국 이 남성은 12번째 테러에 절명한다.”

 
여러분은 위의 남성이 누구일 것으로 예상하시나요?



  해방 이후 암살로 죽음을 맞이한 그는 바로 몽양 여운형입니다. 그렇다면 여운형이라는 인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나요? 백범 김구나 도산 안창호와 같은 독립운동가들과 견주어 보았을 때 말이죠. 몽양 여운형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이자, 해방 이후 스스로를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칭하며 건국준비위원회를 설립을 주도한 대중 정치가입니다. 건준위는 ‘건국동맹’ 주도의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통일전선 단체로 그 역사적 의의가 큰 단체이죠.

  하지만 오늘날 대중의 인식에서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은 크게 자리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이에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의 발자취를 살펴보고, 독립 이후 시대상 속 여운형을 통해 위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시작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을 조작하여 독립운동가 105명을 감옥에 가둔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으로 한국의 민족주의 진영 및 반일 기독교 진영이 대 탄압을 받게 됩니다. 이에 여운형은 중국 망명을 선택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중국에서의 활동기가 시작됩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 윌슨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내걸고, 러시아에는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면서 세계정세는 변화를 겪게 되는데, 윌슨 대통령의 연설에 공명한 여운형은 당시 상해에 방문한 윌슨 대통령 사절인 크레인을 만나 한국 대표의 파견에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전달함과 동시에 신한 청년당을 조직하여 파리 강화 회의의 대표까지 파견하게 되죠. 다른 한편으로 2·8 독립선언과 국내의 3·1 운동에도 비밀리에 간접적인 형태로 깊이 관여하였고, 훗날 황실 우대 사항으로 이견을 보여 거리가 멀어졌지만, 초기 상해 임시정부에서 외무부 차장을 지내는 등 여운형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게 됩니다.

  여운형은 1919년 말 일본에 방문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친일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았던 사건임과 동시에 일본 본토에서 최초의 합법적인 방법으로 조선 독립에 대해 연설한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남게 됩니다. 1919년 3.1 운동은 임정이 설립되는 등 독립운동의 본격적인 불씨로 작용하게 되는 한편 일제에게는 식민지 정책에 큰 변화를 야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이제는 ‘문화통치’라는 명칭으로 친일파를 양성하여 내부 분열로 자멸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일제는 그 정책 방향을 설정한 것이죠. 그리고 그 타깃이 여운형이었습니다. 여운형은 기존의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개인 자격으로 일본에서 약 3주간 수차례에 걸친 고관 회담에서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고, 조선의 즉시 독립을 설파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민족 자결주의에 바탕을 둔 조선의 독립운동이 세계적 정의의 표현이며 세계 평화를 위해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것을 일본의 정계 및 지식인 세계에 분명히 알린 귀중한 계기가 되었죠.

 

새로운 독립 방편으로서 사회주의· 공산주의와의 만남


  상해로 돌아온 여운형은 1918년 이래 기대를 모았던 파리 강화 회의와 민족자결주의가 결국 식민지 재분할이라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해관계만을 대변한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고, 이에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때문에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 ‘수단’으로서 사회주의· 공산주의와의 접촉을 시도하게 됩니다.(훗날 우파에게 공격을 받게 되는 부분이죠)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은 1920년에 국내 소수민족의 해방과 권리를 보장할 것을 선언하는데, 이는 많은 조선 독립운동가들에게 민족 해방의 또 다른 길을 열어준 것이었습니다. 같은 해 여운형은 고려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며, 1921년 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2차례에 걸쳐 레닌을 만나며 러시아 혁명을 거울삼아 조선 독립의 모습은 민족 해방과 민족 내부 평등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뒤 열정적으로 임정 활동을 자처하나, 생각만큼 임정 활동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임정 창조파에 속했던 그에게 장애물은 많았었죠. 한편, 중국 국민당의 손문과 중국 공산당의 구추백과 친분이 있었던 여운형은 그들 사이에서 국공합작의 보이지 않는 조정자 역할을 했는데, 이는 중국 국공합작을 통한 혁명의 성공이 곧 조선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국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1929년 일제에 의해 수감됩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몽양 여운형은 사상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부터 민족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까지 섭렵한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탈바꿈합니다. 즉, 좌냐 우이냐 라는 차원이 아닌 좌우합작적 형태의 민족 독립을 꿈꾼 것이죠. 그리고 본격적으로 몽양의 정치활동 특징인 대외적인 민족자주·주체의식, 대내적인 민족 내부의 통일·단결 사상이 그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1930,40년대 폭압의 시대


  1932년 4개월 형기를 남기고 출옥한 몽양 여운형을 일제는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대중적 명망을 가진 여운형을 제국주의 정책에 편입시키려 하죠. 한편, 30년대 조선 내부는 다양한 대중운동들이 등장했습니다. 조선 공산주의 운동을 필두로 노동, 농민, 청년, 부녀 운동 등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좌우합작 민족 협동 전선인 신간회가 해산되면서 개량적 민족주의자들의 친일은 노골적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설 곳이 점점 없어지는 가운데 여운형은 ‘합법적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하면서 1933년 조선 중앙일보 사장으로 국내 항일운동에 복귀합니다. 여운형은 여러 차례 기고를 통해 총독부 당국의 식민 정책을 비판하고 학생, 노동자, 빈민에 대해 지지와 원조를 보내는 등 언론 활동이라는 합법적 형태로 항일 활동을 전개하죠.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일장기 말소 사건’이 있는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삭제하여 처음으로 기고합니다. 이후 동아일보가 다시 사진을 재사용하면서 사건은 커지게 되고,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중앙일보는 37년 일제의 감시 아래 자진 폐간하게 됩니다. 4년이라는 합법적 독립운동 시대가 끝이 난 것이죠.

  1940년대 중일전쟁에 이어 진주만 습격까지 전쟁의 범위를 확대해갔던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물적 자원은 물론 인적 자원까지 서슴없이 약탈하며 압박의 강도를 높여나갔습니다. 항일운동은 물론 조금의 애국사상을 보이더라도 무조건 투옥이 되어 전향 문을 강요당하는 등 일제의 폭압 속 민족운동은 더욱더 설 곳을 잃어가죠. 이러한 일제의 발악 속에서 여운형 또한 이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운형은 1942년 다시 투옥되는데, 일제의 패전 기운 상황과 독립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다는 명목에서였다. 1943년 일제는 그를 풀어주는데, 지속적인 압박으로 전향문을 쓰게 하고, 친일 담화를 한 것처럼 날조하는 등 독립운동가로서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해방 이후 그의 정적들에게 비난과 비판의 실마리를 제공하게 되죠.

건국을 향하여: 건국동맹의 결성


  한편, 형무소 생활 당시 여운형은 새로운 단체를 구상하는데, 마침내 1944년 8월 몽양 출옥 이후 비합법 조직인 ‘조선 건국동맹’이 출범하게 됩니다. 이 조직을 설립할 당시 몽양의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패망을 눈앞에 둔 일제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가선 해방 조선의 정국을 보다 주체적으로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건국동맹은 해방 직전 상황에서 일제 패망을 전제로 건국을 준비했던 국내 유일한 건국 준비 조직체였고,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모체가 되는 조직이었습니다.

  건국강령에 따른 건국동맹은 계층과 사상을 초월한 민족 통일 전선을 형성하며 일제를 타도하고, 독립을 위해 투쟁할 것이며, 해방과 동시에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이룩할 것이라는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규모와 계층 면에서 당시 건국동맹의 위상은 상당하였으며 체계적인 내부 조직 구성과 산하 기구들이 생기면서 일제 패망 직전 건국동맹은 건국 준비 단체로서 선두적인 역할을 하게 되죠. 그러나 패망 직전 국내에서는 건국동맹을 제외하고 이렇다 할 조직적 합법적 건국 준비 단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여운형은 건국동맹이 필두가 되어 건국강령을 기반으로 노선과 나이 계층을 막론하는 범국민적 기구를 구상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해방 이후 국가 건설을 열망했던 민족적 요구에 부응하여 민중 스스로 조직한 건국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비록 과도기적이고 한시적인 임무였지만 해방 정국에서 실제 정권 수립에 큰 원동력으로서 작용하게 됩니다.

해방 이후의 여운형과 그에 대한 평가

  

  여운형은 어떤 인물이었는가요?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투쟁했고 대중과 소통하는 대중 정치인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지향하는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신념에 대한 굳은 의지를 바탕으로 자신감이 넘치는 대담한 실행가였죠. 그가 스스로 진보적 민족·민주주의자로 자처했던 것처럼 몽양 여운형은 사회주의에 공명했으나 정치적 공산주의자는 아니었고, 단지 그에게 노선이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한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운형은 해방 이전의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논란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의 한반도의 정치 상황에 따라 여운형에 대한 평가 또한 변하는데, 좌익세력은 ‘혁명 동지’라 칭하는 한편 ‘회색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하였습니다. 미 군정 당시는 그를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인’이라고 평가함과 동시에 정치적 약점을 잡아 우파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목적 아래 ‘기회주의적 공산주의자와 함께 그를 친일’이라 비난하였죠. 이렇듯 냉전체제, 남북 대립 그리고 좌우의 이념 갈등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해방 직후 한반도 현실 속에서 통일 독립국가 수립을 위해서는 세 층위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한반도에서 미소 양쪽이 만족할 수 있는 태도를 보이고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야 함과 동시에 좌우합작을 통한 남북연합만이 통일 독립국가 설립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자 가장 현실적이고 민족적인 노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냉전체제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으며 좌우 대립 속에서의 남북의 분열은 고착화되어갔습니다. 급박하게 흘러가는 한반도 정세 속에서 여운형은 극단적인 논란과 비난의 표적이 되어 수차례의 테러를 당했고, 결국 우파 계열 청년에 의해 암살을 당하며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극단의 길을 걸은 한국 속에서 여운형은 해방 정국 이후 ‘건국’이라는 목표 아래 본격적 활동을 뒤로하고 생을 마감하지만, 그의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의 노선은 가장 이상적인 노선으로 평가받게 되었고 뒤이어 김규식이 이어받아 김구와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기억 속에서의 여운형


  앞선 설명에서 볼 수 있듯 몽양 여운형은 사회주의적 가치를 수용했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 스스로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칭하였으며 실제로도 그러했죠. 이분법적 이데올로기가 전부였던 냉전체제를 지나오면서 좌익으로 분류된 여운형은 해방 이후 좌익 정치가로 단정 지어 평가절하 됐고, 오늘날까지도 독립운동가로서 그를 기억하지 못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허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분법적인 세계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않았던 그에게 사상은 목적이 아닌 현실 타개를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유일한 가치는 민족의 통일·단결이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국민대표회의·건국동맹 등에서 계급·신분·빈부·사상을 막론한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을 추구했고, 해방 이후에는 좌우합작· 남북연합의 한 길을 추구했던 그의 행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이죠. 이렇듯 일제 강점기 해방을 위해 앞장섰던 인물이자, 좌우의 흑백논리에서 벗어나서 유연한 사고로 자신만의 신념을 이어갔던 여운형. ‘좌와 우’라는 20세기 낡은 이데올로기로 그를 평가하기보다 유연하고 다각적 차원에서 그의 독립운동과 건국 운동을 바라보고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참고문헌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정병준, 「여운형-좌우와 남북의 통일 독립국가를 지향했던 진보적 민족주의자」, 『한국시민강좌』 47, 한국사 시민강좌, 2010, pp.149-165.
변은진, 「1932년 여운형의 국내활동과 건국준비」, 『한국인물사연구』 21, 한국인물사연구회, 2014, pp.473-504.
최상용, 「여운형의 사상과 행동-원칙과 타협의 지도자」, 사상 14, 1992, pp.71-95.



인물탐구: 잊혀진 독립운동가, 여운형 - 에디터 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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