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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ssical Jan 24. 2017

신사임당, 왜 그녀여야만 했는가? 2부

- a.k.a '현모양처' / 에디터 소.소

안녕하세요! 답사 특집호로 다시 찾아뵙게 된 에디터 소.소입니다!

     

에디터 조史사와 함께 1부 잘 감상하셨나요?

앞선 1부에서는 신사임당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신사임당 담론 형성의 시발점에서 어떤 정치 문화적 시도가 있었는지 함께 이야기했었는데요. 이번 2부에서는 2세기가 지난 20세기, 제국주의의 폭풍과 혼란 속에서 신사임당은 또 어떻게 재탄생했는지 이야기 나눠보고자 합니다. 바로 시작하죠!


1. 20세기 ‘신여성’의 상징, 신사임당  

   

사진1.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욱일승천기


20세기 초 제국주의 어두운 구름은 한반도에도 드리워졌습니다. 중국의 계속되는 참패, 열강들의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제국주의로 무장한 일본까지, 국가의 존망이 달린 위태로운 상황에서 조선에는 부국강병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죠. 애국계몽운동의 가장 큰 희망은 근대적 교육을 통해 ‘백성’들을 ‘국민’으로 계몽시킴으로써 부국강병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성교육 또한 애국계몽운동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이 등장한 이유는 여성을 부국강병의 주체로서 인식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양육의 책임자로서 여성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교육이 필요했다고 보았죠. 즉, 어머니가 된다는 전제 아래 여성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키는지가 결국의 국가의 계몽과 연결된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사진2. 조선시대 고부간의 모습


그러나 여성들의 교육을 금기시하고, 그들의 역할을 내조와 양육에만 국한시켰던 조선의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여성들을 교육시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여성 스스로도 그리고 부모들도 그들을 교육시키는데 거부감을 느꼈죠.


문제는 방법이었습니다. 어떻게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그들에게 인식시켜줄 수 있었을까요?      


사진3. 신사임당


바로 신사임당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인지도가 높았던 신사임당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죠. 그러나 그녀는 전통적 의미에서 ‘현모’의 이미지로 소비되지는 않았습니다. 근대적 교육의 수혜자인 여성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서구의 문물을 수용한 여성, 박식한 여성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자식들까지 잘 교육시키는 ‘신여성’으로 그려졌죠.  

    

하지만 ‘신여성’의 트레이드 마크로 신사임당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신사임당은 다시 전통적 의미의 ‘현모양처’로서 또다시 옷을 갈아입게 되죠.

     

2. 잘난 여자? ‘신여성’에 대한 반감 그리고 다시 돌아온 ‘현모양처’ 신사임당     


사진4. 서구 근대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들


근대적 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의 등장은 1920,30년대 젠더 담론들을 양산하는데 앞장서게 됩니다. 이들은 조선 사회 전통적인 성 역할에 대해 반발하고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남성들에게는 현부양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여성들에게는 현모양처를 요구하는 이중 잣대를 비판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전통이라는 명분 아래 거대한 가부장제는 소수의 그들이 타파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했습니다. 결국은 이 여성들을 다시 억압하기에 이르죠.      


사진5. 학교교육을 받은 여학생들


신여성들을 대항하는 가장 대표적인 논리는 집안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민족운동으로 연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애국계몽운동에서 여성교육을 강조했던 이유와 마찬가지로 양육의 책임이 전적으로 어머니, 여성들에게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었는데요. 일제 강점기 아래 민족의 장래는 어머니들이 조선 민족의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지에 따라 달려있기에 그들이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 아이들 교육에 힘써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초유의 위기 상황 아래에서 젠더 담론은 시기상조이고 어쩌면 민족주의에 반하는 것이었죠.

    

사진6, 사진7. 신여성(모던걸)을 풍자한 그림


1930년대 근대화에 대한 반감 또한 신여성을 억압하는 기재로 작용하게 됩니다. 침탈을 목적으로 일제가 주도한 근대화와 제국주의라는 괴물을 낳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은 신여성을 ‘나쁜 여성’으로 의미화하게 합니다. 신여성은 서구적 스타일을 찬양하고, 남성들의 노력의 대가를 뺏으려 하며 더욱이나 살림은 안중에도 없는 ‘모던 병자’의 상징이 되죠. 민족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소비와 향락에 빠져 사는 여성들에 대한 혐오감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렇듯 모더니즘을 대변한 신(新) 여성들에 대한 반감은 오히려 전통적인 구(舊) 여성에 대한 향수로 이어지게 됩니다. 여성들에게 재래의 아름다운 전통과 교양을 강조하며 신여성들이 향유하는 문화가 비정상적인 것으로 분리시키죠. 이와 같은 전통에 대한 향수 속에서 ‘현모양처’의 의미는 계몽과 근대 여성교육의 상징에서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전통적 여성상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사진8. 신사임당과 그의 자녀들 일러스트


현모양처가 다시 재래적인 여성상으로 재정의 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신여성의 상징이었던 신사임당의 이미지 또한 전통적 의미의 ‘현모양처’로 변하게 되었는데요. 신사임당의 개인적인 능력보다는 그녀가 훌륭한 어머니이자 아내임이 더욱 부각되어 재생산되었습니다. 이제는 율곡 이이뿐 아니라 4명의 아들의 뛰어난 능력까지도 그녀의 공으로 돌리기에 이르죠. 또한 남편이 어려움을 겪었을 때 지고지순하게 이를 감내하고 극복하는 여성으로서 신사임당을 그리게 됩니다.      


3. 아! 아들아 훌륭하게 자라 전장에서 싸워라!, ‘군국의 어머니’ 신사임당        

 

전통적 여성상으로서 ‘현모양처’로 재정의 된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1930년대 반 근대화 사회 흐름 속에서 빠르게 굳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1940년대까지 이어지게 되는데요. 이는 일제의 총력전 체제 아래 선전 도구로서 적극 활용될 기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현모양처와 선전도구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이미지들은 어떤 맥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사진9. 1940년대 일제의 총력전 체제

총력전 체제로 들어가면서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병력을 차출해나갔습니다. 그리고 1941년 진주만 습격으로 태평양 전선이 확대되자 본격적으로 징병제를 실시하게 되었는데요. 식민지 조선 땅에서 징병제를 실시하는 것은 일본 본토에서 징병제를 실시하는 것보다 위험성이 더욱 컸습니다. 민족과 국가를 강탈한 일제를 위해 전장에서 죽어야 할 당위성이 없었기 때문이죠.

     

일제는 전쟁의 당위성과 일제 신민으로서 목숨을 내놓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를 강조하기 위한 여러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신사임당이 군국의 어머니라는 타이틀을 달고 선전 사업의 일환으로 활용되죠. 그 명분은 이러했습니다.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내는 것 그리고 그 아들들을 이 사회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도록 (일제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 신사임당처럼!     


사진10. 역사저널 그날, 이숙인 교수


예술 공연들은 신사임당을 주제로 군국의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였는데요. 특히 야담꾼들이나 연극을 통해서 현모양처 신사임당은 더욱 극단적으로 헌신적인 여성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녀의 개인적 업적은 언급하지 않았고, 단지 그녀의 부덕함과 지고지순함만을 강조할 뿐이었습니다. 전통적인 형태의 여성으로서 소비된 것이죠.      


한편, 여기서 특징적인 점은 1900년대 초와 1930년대까지 ‘현모’로서의 역할이 ‘양처’보다 강조되었다면, 1940년대는 ‘양처’의 역할 또한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는데요. 신사임당을 주제로 한 야담과 연극에서는 그녀의 효성과 남편의 무능함 속에서 그를 잘 보필하고 정조를 지키며, 모든 역경을 이겨내는 모습을 강조한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죠.


사진11. 전시체제 아래 후방에서의 여성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 이유는 남편의 무능함은 시련, 즉 전시체제를 의미하는 것임을 캐치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전시 체제 아래에서 남편과 아들의 부재를 대신해 부모를 봉양하고, 그 속에서 남은 자식들을 길러 나라를 위해 애쓰는 인물로 길러야 하는 여성을 상징하는 것이었죠.

    

실제로 신사임당을 ‘군국의 어머니’로서 조선 땅에서 한국인들이 인식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일제의 바람대로 여성들 스스로 자신의 자식들을 전장으로 기꺼이 내보내려고 했는지도 말이죠.  

    

그러나 확실한 것은 시대적 정치 지형의 변화에 따라

현모양처였던 신사임당은 군사적 책임이 있는 여성으로까지 탈바꿈했다는 것입니다.      


사진12. 고액권 5만원에 채택된 신사임당


신사임당은 일제 시기 이후 한국전쟁 속에서도,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도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매번 다른 옷을 입고 등장했습니다. 5만 원 권 화폐에 있을 수 있었던 신사임당 그리고 방영 예정인 이영애 주연의 드라마 ‘신사임당’에서의 그녀 모습이 바로 지금 우리 시대에서 재생산된 신사임당인 것이죠.


그렇다면 이쯤에서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가 알고 ‘진짜’ 신사임당은 누구인지에 대해서요. 16세기의 신사임당이 진짜인가? 신여성 신사임당인가? 아니면 5만 원 권에 있는 위대한 여성 신사임당인가?라고 말이죠.       




오늘 에디터 소.소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어지는 ‘신사임당, 왜 그녀여야만 했는가?’ 3편에서는 에디터 minion과 함께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신사임당은 어떻게 등장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번 주 금요일 7시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문헌    


단행본

고연희, 이경구, 이숙인, 홍양희, 김수진,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 다산기획, 2016    


국문논문

박지현, 「화가에서 어머니로 : 신사임당을 둘러싼 담론의 역사」, 『동양한문학연구』, 제 25호, 2007

홍양희, 「‘현모양처'의 상징, 신사임당」, 『史學硏究』, 제 122호, 2016

이숙인, 「신사임당 담론의 계보학(1)」, 『진단학보』, 제 106호, 2008

조규희, 「만들어진 명작: 신사임당과 초충도(草蟲圖)」, 『미술사와 시각문화』 제12호, 2013

박민자, 「신사임당 탄신 50주년 기념논문 : 신사임당에 대한 여성사회학적 조명」, 『밤나무골이야기』, 제17호, 2005

이은혜, 「조선시대 강릉지방의 여류 문학 -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을 중심으로」, 『나랏말쌈』, 제18호, 2003



신사임당, 왜 그녀여야만 했는가? 2부 - a.k.a 현모양처/ 에디터 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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