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70년대 박정희 군부독재시절의 그녀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다시 돌아온 에디터 미니언Minion입니다!
오늘은 신사임당 답사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예이!!!)
1960년대부터 시작된 박정희 군부독재시절에는 신사임당이 어떤 식으로 이야기되었을까요?
+공유하고 싶은 의견 & 질문들 모두모두 소중하게 생각하겠습니다! 언제든 댓글로 달아주세요:)
-박정희 시기 현모양처 신사임당 이미지의 재생산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史적인모임 에디터 미니언Minion입니다! 드디어‘신사임당, 왜 그녀여야만 했는가’ 3부에서는 1960년대와 70년대박정희 독재정권시기에 어떻게 신사임당의 이미지가 재생산되었는지를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언제나 변함없이궁금한 점이 있으시거나 의견을 공유하고 싶은 독자 분께서는 언제든지 댓글이나 쪽지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신사임당 담론 그 마지막 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앞서 2부에서 에디터 소.소와 함께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시기때 ‘군국의 어머니’로서 소비되었던 신사임당은 한참 뒤인 1960년대부터 박정희 체제하에 다시 한 번 ‘한국의 어머니’로서 재생산되게 됩니다.
사실 박정희 정권 하에서는 신사임당뿐만 아니라 이순신장군이나 세종대왕 등 다른 역사적 인물들도 영웅화되는 모습을 볼 수있는데요, 이는 쿠데타라는 부당한 방법으로 세워진 자신의 정권하에 국민들을 통합시키고 그들이 한 민족이라는정체성을 가지도록 하기위해서 였습니다. 이를 위한 한 방법으로 바로 역사와 전통이 이용된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이러한 역사적 인물들이 모두 전근대시기의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기존 체제를 부정하고 독재정권을 세운 박정희로서는 일제시기나 한국전쟁과 같은 가까운 역사보다는 좀 더 이전의먼 역사를 끌어올 필요가 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사임당과 같은 전근대시기 역사인물들의 영웅화과정을통해 박정희는 초기 자신의 독재정권을 정당화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게다가 신사임당이라는 인물은 이순신이나 세종대왕과 같은 다른 역사적 위인들과는 다르게 여성이라는 점에서 박정희 정권에게더욱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본인이 실시하고자 했던 새마을 운동이나 가족계획과같은 국가 사업이 효과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여성들을 체제 내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신사임당은 이를 위한 완벽한 인물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왜 하필 신사임당을 필요로 했는지는 그가 진행했던 대표적인 두 국가사업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게되는데요, 이 중 하나가 오죽헌 정화 사업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사임당 교육원 설립 사업이었습니다.
우선 오죽헌 정화 사업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오죽헌 정화사업은 본래 신사임당보다는율곡 이이를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영웅 만들기 프로젝트를진행할 때부터 박정희는 율곡에 주목했는데요, 이는 그의 치밀한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율곡 선생의 수 많은 업적 중에서도 유독 임진왜란시기의 십만양병설에 집중하였고 이를 자의적으로해석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토붕와해(土崩瓦解)의 난국에 처했을때, 무인으로서 나라와 민족을 구출해낸 성웅이 충무공 이순신장군이라면 높은 식견과 예리한 선견지명을 가진 문인으로서그 위란을 미리 내다보고 십만양병을
주장하는 등 나라와 겨레를 도탄에서 구하려고 혼신노력한 선현은 바로율곡선생"
-1976년 오죽헌 정화작업 완료 후, 강원도가 발행한 『오죽헌 정화지』 中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의 위기 상황에 무인들 못지않게 나라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했던 율곡 선생을 위처럼 추앙함으로써 박정희정권은 당대 모든 남성들을 비롯한 국민들 역시 율곡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나라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는 유신논리를 정당화하고자한 것입니다. 그 결과, 현재 자신의 군사정권이 먼 과거율곡 선생의 참 뜻을 이어받은 정당한 정권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목적의식에 따라 1962년 오죽헌에서는 제 1회 율곡제가 실시되어 율곡을 기린다는 명목 하에 온갖 전통문화행사가 진행되었고, 1963년에는 오죽헌을 보물 제165호로 지정하여 본격적인 오죽헌정화사업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율곡기념사업회가 주도하여 율곡과 신사임당의 영정을 제작하고이를 각각 어제각과 몽룡실에 봉안하게 됩니다.
여기서 신사임당의 영정이 몽룡실에 모셔졌다는 사실은 한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몽룡실은신사임당이 흑룡의 꿈을 꾸고 율곡을 낳은 장소입니다. 신사임당의 영정이 이곳에 모셔졌다는 것은 그녀가율곡의 어머니로서 기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국가에 충성심이 투철한 율곡이라는 아들을 생산해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로서 신사임당이 존경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박정희 정권은 신사임당을 통해 당대 여성들에게 ‘국가에 충성하는아들을 많이 생산해내야 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전했던 것입니다. 그것은여성들이 해야할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임무였던 것입니다.
국가를 위해 충성심이 투철했던 아들과 그를낳아 현명하게 잘 교육했던 어머니는 유신체제가 지향했던 모범적인 모자상이었고 이는 오죽헌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을 통해 대중에게 전해지게 됩니다.
오죽헌 정화사업을 통해 자신의 정권을 어느정도 정당화 하는데 성공한 박정희는 1970년대부터본격적인 유신체제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와 함께 그가 신사임당이라는 인물을 통해 여성들에게 요구하는역할도 이전과는 사뭇 달라지게 됩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인의 정권을 하루 빨리 정당화 해야했던 이전 시기에는 여성들에게 가정에서 남편을 잘 보필하고아이들을 (특히 아들을) 많이 낳아 국가에 충성하는 인물로교육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모습이 요구되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1970년대부터는 단순히 현모양처에 한정되기 보다는 거기서더 나아가 유신체제가 내세우는 국가관을 스스로 체득하고, 정부가 시행하는 정책들을 일상에서 그리고 가정에서직접 실천할 수 있는 여성이 필요했습니다.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유신체제의 한 일원으로써 이용되기 시작한것입니다.
박정희는 이를 위해 다시 한 번 신사임당을 모든 여성들의 롤모델로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신사임당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현모양처의 이미지에, 유신정권의국가관과 정책들을 몸소 이해하는 실천적인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덧붙임으로써 박정희 유신체제의 입맛에 딱 맞는 완벽한 여성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때문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 바로 사임당교육원 입니다. 대통령의 적극적인지시로 강릉 주문진에 설립된 이 사임당교육원에서는 많은 여학생들이 사임당의 얼을 본받아 전통적인 부덕과 미를 배우고 현모양처로서 필요한 자질을교육받았습니다. 겉으로는 단순히 전통 예절이나 도덕을 교육하는 기관인 것처럼 느껴지 별 문제가 없어보이기도 하는데요. 사실 이와 같은 전통예절교육은 사임당교육원의 주된 교육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교육목적에서도 ‘투철한 국가관’, ‘반공애국정신을함양’ 등 국가에 대한 충성을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고 교육방침에서도 주로 ‘집단활동’이나 ‘단체훈련으로협동생활’을 하는 등 개인보다는 집단과 협동에 유독 주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육 내용 전반적으로 ‘새마을 정신’에 대한 강한 강조를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요, 이는박정희 정권의 주된 사업이었던 새마을운동에 대한 집단적 주입교육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본 사임당교육원에서 교육을 수료한 당사자가 그때의 상황을 회고한 글에서 당시 유신체제가 어떠한 여성상을 원했고이를 사임당 교육원을 통해 어떻게 교육시켰는지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교련복과 한복을 거듭해서 바꿔입는 생활이 잘 표현해주죠. 봉건적인 전통 여성상,(중략) 반공의식과 투철한 투쟁의식으로 무장한 여성군인상의 복합이 아마도 그 이상었다고 생각됩니다. 어두운 강당에 모이라고 하더
군요. 너무 깜깜해서 밀린 잠을 때우려고 하는데, 갑자기 뭔가 비쳐나오고 있었습니다. 서서히 밝아지는 것은 태극기였습니다. 갑자기 모든 여학생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2005년 권인숙의 『대한민국은 군대다』에 실린 사임당교육원 수련생의 회고인터뷰 中
신사임당으로 대표되는 봉건적인 여성상으로겉을 치장하곤 그 내면에서는 ‘반공의식과 투철한 투쟁의식으로 무장한 여성군인’을 양산하고자 했다니 참 모순적이죠? 이처럼 박정희와 그의 유신체제는사임당교육원을 설립함으로써 마치 신사임당의 부덕과 인품을 여성들에게 교육하고자 하는 것처럼 국민들을 속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기르고 유신체제에 적극 동조하는 여성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신사임당은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전통과 부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기 위한 도구로서 다시 한 번 재생산된것입니다.
지금까지 史적인모임의 세에디터들은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1970년대 박정희독재시대에 이르기까지 신사임당이라는 한 인물이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고 이용되어왔는지를 이야기해보았습니다.
저희가 이 글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결코 신사임당이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거나 존경할 만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녀는 율곡의 어머니이기전에 훌륭한 화가였고, 전통 유교사회를살아가는 한 여성으로서 남편을 잘 보필하고 아들을 훌륭히 키워낸 현모양처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다만 저희는 신사임당이라는 한 사람이 시대에 따라서, 그리고 기득권의 이득에 따라서 어떻게 다르게 이야기 되어왔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끝으로 저희 세 에디터들은 지난 3주간의 노력이 담긴 이 글을 이숙인 교수님의 문장을 인용하며 끝내고자 합니다.
-이숙인교수님의 「그런 신사임당은 없었다: 권력과 젠더의 변주」 中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신사임당은 진짜그녀의 모습일까요, 아니면 거짓된 모습일까요? 혹시 진실도거짓도 아닌 담론 안에서 마치 진실처럼 존재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단행본
고연희 외 4인(2016), 『신사임당, 그녀를위한 변명: 시대와 권력이 만들어낸 신사임당 이미지의 변천사』, 서울: 다산기획.
*논문
김수진(2008),「전통의 창안과 여성의 국민화」, 『사회와 역사』, Vol.80, pp. 215-225.
권오현(2009), 「역사적 인물의 영웅화와기념의 문화정치-1960년대~1970년대를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논문.
이숙인(2009),「그런 신사임당은 없었다: 권력과 젠더의 변주」, 『철학과현실』, pp. 136-149.
이소라(2013),「박정희 정부의 민복문화사업과 국사교육」,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