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ssical Aug 27. 2017

택시운전사가 좋은 영화인 이유

우리가 5.18을 기억하는 방법은 왜 첫째, 시민군인가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다룬 영화 '택시 운전사'가 지난 8월 27일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 개봉 이후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 대체로 낮은 평점을 주었다. 너무나 뻔한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쉽다, 외신 기자 역할이 다소 평면적이었다, 캐릭터들의 소시민적 설정이 너무 전형적이다 등 여러 지적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시 운전사는 좋은 영화라는 결론을 내렸다.


왜냐하면, 영화가 담은 광주 사건의 기억이 ‘주변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5.18이란

5 18 기념재단은 5·18 민주화 운동을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과 미군의 지휘를 받은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등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두 줄의 정의는 우리 사회가 5.18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시민군 대 계엄군, 더 나아가면 민주주의 대 독재정치. 한국 사회는 이 틀 속에서 5.18을 인지하고 있다.    


그럼 우리는 5.18을 왜 이렇게 기억하고 있을까?  


80년 5월 26일에, 계엄군이 전남도청에 끝까지 남아있던 시민군들, 즉 ‘기동 타격대’를 향해 집단 발포한 사건이 일어났다. 약 한시간의 교전이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이 사건은 10일 간의  항쟁 기간 중 가장 비극적인 부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비극의 절정으로 기억되는 만큼, 당시 시민군은 군부 독재정권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저항 세력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5.18의 주인공으로 선택되었다. 


2007년 개봉한 영화 '화려한 휴가'는 한국 사회가 선택한 5.18 묘사 방식의 적절한 예다. 영화는, 계엄군에게 동생을 잃고, 전남도청에서 끝까지 항쟁하다 목숨을 잃는 시민군의 시선을 중심으로 당시를 그린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5.18 민주화 항쟁의 모습을 위의 식에 따라 기억하고 있다. 


이는 광주 민주화 항쟁의 직접적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중요한 서술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문제는, 5.18이 위의 식대로만 묘사될 경우 사건이 단편적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는 데에 있다. 5.18을 설명할 때 사건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 즉 저항의 최전선에 선 사람들의 시선만을 선택하는 것은 그 항쟁이 유지될 수 있도록 기여한 또 다른 사람들을 끌어안지 못한다. 중심부가 정해진 5.18 항쟁에서 그들은 그저 주변인일 뿐이다.  또한  5.18의 주체가 시민군으로 설정되면서 이 사건은 오히려 과거에 묶이게 되었다. 예컨대, 시민군의 시선으로 그려진 5.18 항쟁은, 시민군과 계엄군이 실재하지 않는 현재에는, ‘과거에 있었던 일’로 고정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건 부정적인 사이클을 만든다. 과거의 시점에 못 박히는 순간, 어떤 장치 없이는 기억될 수 없는(예컨대 영화나 드라마, 소설 같은 대중매체), 계속해서 망각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건이 된다. 망각되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도록 사건의 비극적인 부분이 극대화되고, 계속해서 그 비극만을 소비하는 것이다.   


5.18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민군의 무장투쟁과 그 죽음의 비극성을 떠올리는 것은, 그 비극이 실화인 것도 이유이지만, 우리가 위의 사이클에 진입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5.18을 시민군의 죽음으로만 묘사한다면, 그들이 총을 맞는 장면이 흐릿해지는 순간 사람들은 광주를 계속해서 잊을 수밖에 없다.  


5.18에 대한 최대한 다양한 시선을 수용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억지로 기억해야 할 대상이 아닌 생명력을 가진 대상으로 남기기 위해서, 저항의 최전선에 서 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항쟁을 가능하게 한 여성들, 노동자들, 간호사들, 그리고 광주 외부의 주변인들을 조명해야한다. 그렇게 그들의 경험을 공유하고 공감함으로써 5.18을 보다 입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피 흘리는 역할은 아니었다고 해도 말이다.         


노동조합원 윤청자 씨의 진술 

(여성 노동조합원들과 27일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밥을 해주던 사람들 중 한명 ) 

"5월 27일, 우리가 마지막 밤까지 (도청에서)밥을 해주다가 끝내는 그 애리디 애린 것들이 여자를 보호한다고 우리한테 '누군가는 살아남아서 이 소중한 역사에 대해 증언을 해야 되지 않것냐'고 무슨 선지자 같은 얘기를 하는 거야. 설득하면서 우리더러 가라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살았지. 몇 시간 차이로 삶과 죽음이 나뉘었지. 어떤 사람은 망월 묘지에 있고, 우리는 살아서 지금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고.우리도 거기 가있었으면 모르겄지.나는 죽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아무리 어떤 일을 많이 했고 저기 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정말 그것 때문에 괴로웠지. 우리가 입을 함부 로 열 수 없었던 것이 다 그것 때문이제."    


광주 시내 가두방송의 주인공, 전춘심 씨의 진술

(당시 무용학원 강사, 5.18 항쟁 당시 거리에서 광주 시내 상황을 방송 한 인물. 이후 간첩 누명을 쓰고 끌려가 고문 당함. 계엄군과의 협상 위한 시민군 대표 3인 중 유일한 여성.)

"스피커와 앰프를 구해 왔는데 얼마 안 쓰다 그게 고장이 나버린 거예요.근데 나쁜 내 머릿속에 딱 스치는 게 있었어요.‘어디든지 동사무소를 가면 마이크가 있을 텐데’ 그래 가지고 남학생 두 사람을 데리고 학운동 동사무소로 갔습니다.그 때 내 호주머니를 보니까 돈 7만원이 있었어요.7만원 드릴 테니까 달라고 했는데 안줘서 강제로 들고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제 방송이 시작 된 겁니다.

...

그때 저는 운동가도 알고 있는 게 없었어요.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멘트라고는 “광주 시민 여러분,지금 계엄군이 우리 민간인을 죽이고 있습니다.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빨리 깨어나서 도청으로 모입시다”이거였습니다. 그런 방송을 반복하면서 신역으로 오니 20일 새벽이었죠. 그쪽으로 가니까 얼굴 형태를 알아 볼 수 없는 시신 두 구가 있다고 해요. 그것이 계엄군하고 첫 대면이었어요 충분히 내가 방송할 내용이 생긴 겁니다. 그전에는 사람이 죽은 걸 못 봤잖아요. 말로만 들었지."    


의료인 정순자 씨의 진술 (당시 가톨릭 병원 간호사로 근무)

"12시쯤 되니까 우리 간호사가 도청엘 갔다 와서는 난리가 났대요.무슨 난리가 났냐니까 군인들이 모여 있는 시민들한테 전부 총을 쏴서 이리저리 자빠지고,그러면서 앰뷸런스 좀 보내라고 막 호소를 한 대요.조금 있으니까 트럭에도 싣고 오고,또 무슨 봉고차 그런 것을 학생들이 빨간 잉크로 막 칠해가지고는 환자들을 데리고 오는 거예요.

...

20일에 그 난리가 났을 때 피가 모자랐어요.박매근씨라고 캐나다 선교사인데 그분이 양림동에 있는 소설가 황석영 씨 부인한테 말을 해가지고,그 분이 이불 홑청을 뜯어 가지고는 거기다 ‘피가 필요합니다’이렇게 써가지고 막대기에다 붙여서 돌고 다녔어요.우리 현관에서부터 저기 밑에 있는 양림동까지 학생들이 전부 줄을 섰어요.그중에 춘태여고 학생이 있었는데 애기가 커요.그래서 금방 피를 빼고 보냈어요.근디 한 시간도 안돼 갖고 그 애가 딱 총 맞아 죽어서 왔어요."        


구속자의 가족 이귀님 씨 (항쟁 이후 피해자 가족들과 함께 진상요구 지속)    

"교도소 면회를 가면 면회를 기다리는 동지 가족들이 많이 있었어.가족들이 탄원서도 쓰고,혈서도 쓰고,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지.

… 

구속자 가족들이 힘을 결집하기 위해서 가족회를 만들기도 했어.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됐고,데모 현장이 우리들 집이었고 사무실이었지. 자고 나면 시내 현장에서 만나 의논하고 투쟁하고 농성장을 정해 농성하고 몇 년을 그렇게 했어. 유족회,부상자 가족,구속자 가족이 하나가 됐지. 5·18이 민주화 항쟁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우리 가족들의 힘도 상당히 컸다고 생각해.

나는 남편 뒷바라지를 했다기보다는 남편이 구속되면 그 자리를 채워 활동을 했고, 수배됐을 때도 대신 활동을 했다고 생각해. 지금도 어디 현장에 있을 거 같고.

그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받쳐주는 수많은 지원세력들 모금이라든가 실은 먹고 사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해요.이런 것들이 너무 역사 속에서 묻히고 있다 말이에요.수많은 민중들의 이름 없는 그런 집적된 힘들 이런 것들이 너무 무시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사실 근데 가장 중요한 역할들이잖아요. 일을 할 수 있도록 보급부대가 확보되지 않는 전투력은 있을 수가 없잖아요."    


*위의 진술은 모두 실제 인물의 진술이며, 도서 『광주, 여성』 에서 발췌했습니다. 


이외에도 우리는 60세의 나이에도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체를 수습하던 방귀례 씨의 시선으로 5.18을 바라볼 수 있고, 군인들마저도 자식 같아 주먹밥을 먹이려 말을 붙였던 시장 상인 박수복 씨의 시선, 혹은 목격자로서 너무 슬프지만 내 일이 아니라서 희생자 추모식에는 참여하지 않는다는 어떤 이의 시선으로도 볼 수 있다. 80년 광주를 경험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수용하면 할수록, 사건의 여러 층위를 확인할 수 있고, 그 파편들을 통해 5.18의 그림을 보다 온전하게 완성할 수 있다. 5.18 민주화 운동은 '죽음으로 희생한 이들의 기억'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택시 운전사는 5.18의 기록물로써 어느정도 할 일을 다 했다. 직접적인 희생자가 아니라, ‘주변인’이었던 택시운전사의 눈을 통해 광주를 그린 것은, 적어도 5.18에 관한 기억의 새로운 층위를 보여주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이 도망가는 내용이 주가 되다보니 어떤 사람들에게는 밍밍할 수도 있었겠으나, 택시운전사의 기억 또한 5.18의 일부이며, 항쟁 이후가 있을 수 있도록 작동한 힘 중의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간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시선인 것만큼, 기록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영화이기도 했다. 이제는 앞서 소개한 윤청자, 이귀님, 정순자, 전춘심 외 5.18의 다양한 시선들을 선택하고 기록하는 영화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택시운전사 리뷰의 전부다.  



참고 문헌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광주, 여성』,  후마니타스, 2012

박명진,「한국 영화의 역사 재현 방식―광주 항쟁 소재 영화를 중심으로」, 국제어문학회, 『국제어문 41권 0호, 2007

이해영,「기억의 문화사 관점을 통해서 본 5·18민주화 항쟁」, 서울시립대학교, 2015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불편했어야만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