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굴리는 중에도 풀은 피더라

의미란 무엇인가

by lala

성경 마가복음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여기서 ‘헤아리다’는 것은 단순히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말씀을 듣는 자세와 진리를 마주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하나님께서도 그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되갚아주신다는 뜻이다. 같은 말씀을 읽더라도 어떤 사람은 흘려듣지만 어떤 이는 생애의 전환점으로 삼는다. ‘의미’는 본래 그 말씀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과 내가 맺는 관계 안에서 생겨난다.


말씀을 곱씹으며 ‘의미’와 ‘태도’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나에게 의미란 내가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고 마음을 들이느냐에 따라 생성되는 ‘무언가’다. 동일한 사건도 받아들이는 주체의 태도에 따라 전혀 다른 감각과 해석으로 다가온다. 해석 학자 가다머는 “이해란 단지 반복이 아니라 창조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동의한다. 내 태도 속에서 의미는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는 생물과도 같다.


몇 해 전, 네 달간 선교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매주 토요일마다 3시간씩 모여서 강의와 과제를 수행하고 마지막에는 시험까지 치러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이 시간을 버텨내는 건 결코 쉽지 않았지만, 같은 그룹에 그 무게를 묵묵히 견디는 한 청년이 있었다. 그녀는 필기를 꼼꼼히 하고, 예습까지 하며 자진해서 피아노 봉사를 하기도 했다. 시험에서 문제 하나를 틀렸을 때, 손을 들고 왜 오답인지 질문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 친구가 현재 해외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시간에 쏟아부었던 진심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누군가에겐 그 프로그램이 그저 별것 아닌 경험이었겠지만, 그녀에게는 삶의 방향을 정하는 기표였다. 그녀가 부여한 의미만큼 그 시간은 그녀에게 더 깊이 돌아간 것이다.


물론, 의미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은 본래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이들, 바로 니힐리스트(Nihilist) 들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의미가 ‘부여하는 것’이라면, 부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 있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무거운 돌을 산 위로 밀어 올린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 돌을 올리는 과정에서 풀을 보고, 계절을 느끼며,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을 되새긴다. 의미는 목적지에 도달했는가의 여부보다 ‘내가 지금 얼마나 강렬하게 뭘 느끼고 깨닫고 있는지’에 더 가깝다.



얼마 전, 국가에서 주관하는 예술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결과 발표일, 링크를 확인했지만 당락이 분명하지 않아 해당 부서에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는 내 번호를 확인한 뒤 “선정되셨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 한마디가 유난히 오래 마음에 남았다. 이어 그는 예술가로 살아가는 어려움에 공감하며 자신의 경험을 덧붙여주었다. 짧은 통화였지만, 나는 긴 시간 지쳐 있던 나 자신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 통화를 마치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인생을 그렇게 진심으로 응원해 본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내 삶의 서사는 내가 어떤 자세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경 말씀처럼 내가 대하는 방식 그대로 세상도 나를 대할 것이다. ‘그까짓 거 뭐가 대단해’라고 넘긴다면 그 모든 것도 내게서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마음을 담은 태도를 갖는다면 설령 결과가 별것 아닐지라도 그 모든 과정은 내 안에 엄중하게 남는다. 의미는 늘 거기 있지 않다. 내가 의미로 부를 때에야 비로소 생성된다. 그리고 그 순간, 삶은 더 이상 무의미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