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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팸 구호 Aug 16. 2023

#4 9호선 이야기 3

나는 보통 출퇴근 시간에 9호선을 이용한다. 출퇴근 시간에 2호선과 4호선, 9호선 정도를 경험해 본 게 전부지만 적어도 내 경험에는 9호선에 사람이 가장 많았다. 그냥 많은 게 아니라 빽빽하다는 말이 딱 맞을 것 같다. 비유로 많이 사용하는 '발 디딜 틈 없다'라는 말은 9호선을 위한 표현이라고 확신한다. 물론 일반 열차는 그 정도로 꽉 들어차지는 않는다. 지금 얘기하는 건 9호선 '급행열차' 얘기다.


출근 시간 9호선 급행열차는 고속터미널역이나 신논현역에 도착하기 전까지 내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동안 내리는 사람은 많아봤자 3-4명 정도인데, 타는 사람은 뭐 셀 수도 없다. 사실 내가 타는 당산에서 더 이상의 인간 적재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데도 어떻게 한 건지 사람들이 계속 들어간다. 이를 테면 책장에 더 이상의 책은 꽂을 수 없을 것만 같을 때 책 사이를 있는 힘껏 벌리면 놀랍게도 책 한 권이 더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이럴 때마다 상황에 맞게 몸을 유연하게 눌리거나 부풀릴 수 있는 바퀴벌레의 슈퍼 파워가 어쩌면 인간에게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출근길에 고속터미널이나 신논현, 선정릉 같은 역이 아닌 동작이나 노량진에서 내리는 그들은 이를 테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포지션이다. 나처럼 다수에 있는 사람들은 그 소수자가 내릴 때 기꺼이 모세의 기적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전부 고속터미널 넘어서 가는데 도대체 눈치 없이 동작 같은 데서 내리는 건 인성 무엇;'같은 개쓰레기 같은 발상은 하지 않는다는 거다. 모두 소수자를 위해 조금씩 양보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수자가 그 배려를 '권리', 혹은 무소불위의 '권력'같은 걸로 생각할 때 문제가 생긴다.


사람이 많아도 내리는 사람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을 만큼 공간이 있을 때는 그 사이를 쇽쇽 빠져나가 미리 출입문 앞에 서 있을 수 있다. 아무도 뭐라고 안 한다. 비행기가 지면에 닿자마자, KTX가 전 역에서 출발하자마자, 고속버스가 목적지의 톨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가장 먼저 내리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는 게 우리나라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출근길 9호선은 미리 내릴 준비를 할 수가 없는 환경이다. 출입문 앞에 미리 가 있다가 문이 열리지 마자 누구보다 빠르게 튀어나가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는데, 출입문 앞까지 빈 공간이라곤 부모님 집 냉장고 냉동칸급으로 없는 상황에 어떻게 출입문까지 가겠다는 말인가.


그들이 이럴 때 자주 하는 "내릴게요!"라는 주문은 도저히 빈 공간을 만들 수 없는 상황에서도 빈 공간이 만들어지는 리얼 모세의 기적을 일으킬 힘이 없다. 당연히 그 마법은 일어나지 않는다. 책이 꽉 들어 찬 책장에서도 새로운 책을 넣을 공간을 만들려면 기존에 꽂힌 책을 몇 권 뽑아야 빈 공간이 생기지 않나. 지하철에선 사람이 조금 내려야 그만한 공간이 생길 테고, 기관사 아저씨는 사람이 내리고 탈 시간만큼 충분히 문을 열어 놓으신다. 


그런데 내리는 소수자는 '내릴게요'라는 마법의 수문을 외쳤는데도 길이 열리지 않는다며 도저히 길을 열어줄 공간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 경멸의 눈빛을 날리거나 육성으로 욕설을 내뱉기도 한다. 소수자님들에게 비켜주고 싶은 마음이 롯데타워만큼 커도 비켜줄 자리가 없는데 어떡하나. 그 와중에도 '내릴게요' 주문에 맞추어 몸을 아크로바틱 하게 휘어서 피해 주는 대단한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피해 줘도 소수자는 본인이 내릴 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출입문으로 가는 충분한 공간을 내어 주지 않는다고 온갖 짜증을 내며 슈퍼볼에서 봤던 그것처럼 어깨로 스피어를 날리거나 동묘에서 천 원짜리 옷 가지를 헤집듯 손으로 사람들을 밀고 나간다.


역에 도착한 다음 '내릴게요'라고 외치면 사람들이 알아서 잘 비켜준다. 우리나라 국민성이 대단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 정도는 해준다는 말이다. 특히 급행열차는 역과 역 사이에 3-4개 정도 역을 건너뛰는 탓에 다음 역까지 꽤 오래 걸린다. 지금 당장 내리지도 않는데 '내릴게요'라는 되도 안한 주문을 외치며 출입구를 향해 돌진하는 그들을 보면 아직 선로를 달리고 있는 지금 당장 내리게 해주고 싶다. 우리도 당신 같은 사람은 지금 당장이라도 내리게 해드리고 싶어요. 그것이 달리는 중이라도!


비켜줄 자리가 하나도 없는데 내리는 사람이 출입구에 '미리'갈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고 밀고 치며 짜증을 낸다는 말을 길게도 썼다. 사실 더 쓸 수도 있는데 이만하고 참는다. 어차피 내가 이렇게 짜증을 내어 봤자 '내릴게요'라는 종교의 추종자들이 사라질 일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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