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온갖 걸 다 할 수 있다. 영화, 드라마, 예능 같은 영상 소비는 물론이고 게임을 즐기거나 사진을 찍고, 글을 써서 올리거나 심지어는 간단한 영상 편집까지 할 수 있다. 대단한 기계다. 나도 덕분에 큰맘 먹고 샀던 카메라 처박아 놓고 스마트폰 카메라로 사진 찍고 편집하고 다 한다. 증-말 디테일한 편집 거리가 아니면 웬만해선 스마트폰으로 다 할 수 있다. 만약 스마트폰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면 뭘 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두려워서 손이 다 떨릴 정도다. 불안증까지 느끼면 중독이라던데... 아무튼.
많은 걸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은 사실 손바닥 만한 컴퓨터다. 예전에 집에서 컴퓨터 할 때를 생각해 보면 컴퓨터 앞에서 기본 2-3시간은 눌러앉아 있었다. 스마트폰은 그 시절 컴퓨터보다 할 수 있는 게 훨씬 많으니 어련할까. 나뿐만 아니라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보면 전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예전 휴대전화가 하던 통화나 문자 메시지 확인처럼 잠깐 보고 마는 게 아니니까 화면을 한 번 켰다 하면 의지를 갖고 화면을 끄지 않는 이상 도통 눈을 뗄 생각이 없다. 오늘 말할 짜증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100만 원이나 주고 산 '내' 스마트폰을 '내가' 언제 어디서든 마음대로 사용하는 건 당연히 자유다. 24시간 내내 쳐다보고 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한다. 부모님이랑 같이 산다면 잔소리는 좀 들을지 몰라도 아무튼 그렇다. 내 거 내가 보겠다는데 누구에게 뭐라고 할 권리가 있겠는가. 다 알아서 하는 거다. 근데 걷고 있을 때는 '앞'을 봐야 내 앞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피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움직이는 흐름에 맞는 속도로 이동할 판단력도 생길 게 아닌가. 그런데 반드시 봐야 할 그 '앞'이 아니라 스마트폰 화면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콘텐츠가 그때만큼은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건지 현재 사람들의 흐름은 어떻고, 주변 상황은 어떠며 앞에 뭐가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그리고 본인도 앞을 안 보고 걷는 데 대단한 자신감은 없는 건지 매우 조심스럽게 사뿐사뿐 걷는다. 속도가 거의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속 벤자민 버튼이 인생에서 첫 발을 내디뎠을 때와 맞먹는다. 나무늘보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 나무늘보가 훨씬 빠르다.
만약 길이 널찍하거나 사람이 별로 없는 상황이라면 그들이 느리게 가든 아예 말뚝을 박고 서 있든 그냥 피해 가면 될 일이긴 한데, 문제는 서울 중심부에선 그런 경우가 잘 없다는 거다. 혹시 저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 등신대가 아닐까,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천천히 걷는 덕에 뒤에 걷는 사람은 어떡해서든 그를 추월해서 갈 수밖에 없다. 특히 사람이 매우 많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240프레임 슬로 모션으로 이동하는 그들은 그야말로 '장애'물이다.
물론 내가 조금만 노력을 기울여서 그들을 피하면 될 일이긴 하다. 단지 이것은 내가 급한데 앞 길을 막아서니까 답답한 거다. 가장 열받는 건 내 맞은편에서 스마트폰 마니아가 오는 경우다. 그들은 앞을 볼 생각이 없기 때문에 스마트폰에 초점이 맞은 그들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와야만 황급히 피한다. 안 보이니까. 그들에게 부딪치지 않도록 피해야 할 몫은 오롯이 스마트폰 대신 '앞'을 제대로 보고 가는 사람들에게 있다. 그 스마트폰 마니아들은 피할 생각이 허지웅 작가의 집에 있는 먼지만큼이나 없는데, 왜 나는 그들을 '위해' 피해 줘야 하나.
처음에는 그냥 '내가 피해 가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날 '왜 나만 피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 번은 '피하지 말아 보자'라는 결심을 하고 정말로 안 피했더니, 앞에서 오던 스마트폰 마니아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째려보고 지나갔다. 다른 마니아는 '아, 좀 제대로 보고 다니지', '아씨 뭐야'라며 그 상황의 모든 탓을 내게 돌렸다.
그들이 만약 앞을 볼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면 내 탓이 맞다. 보이는 내가 피하는 게 당연하다. 근데 나처럼 잘만 보는 그들을 위해선 내가 먼저 피해 줘야 할 의무가 없질 않나. 그들의 일상이 너무나 바빠서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릴스를 볼 시간이 없는 탓에 길을 걸을 때만이라도 마음 놓고 보도록 배려를 해 줄 이유가 어디에 있나. 이 생각이 든 이후부터 스마트폰 마니아가 앞에 나타나면 절대 안 피한다.
업무적으로 너무 촉박해서 쉬지 않고 메신저를 들여다봐야 하는 상황이면 어떡하냐고? 메시지가 왔을 때 잠깐 가장자리로 비켜서서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걸으면 된다. 그래봤자 몇 초 안 걸린다. 어차피 걸으면서 치면 오타 작렬이라 가만히 서서 치는 거보다 시간이 배로 걸린다. 내가 너무 비효율적이라서 뒤나 앞에서 오는 행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비켜서 주는 게 아니질 않나. 그들에게 피해 줄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 걸으면서 스마트폰에 시선을 박고 가는 것도 그들의 자유인데, 네가 뭐라고 그걸 못 보게 비난하냐고? 어디 그럼 자동차 운전하면서 스마트폰 보는 것도 그들 자유인데 뭐라고 하는 사람들 한테도 같은 말 해봐라. 자동차 운전이 '앞'을 잘 봐야 흐름도 읽고 장애물도 피하는 것처럼, 걷는 것도 자동차에 비하면 살상력이 없을 뿐이지 사실 마찬가지다.
어차피 내가 이렇게 짜증을 낸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스마트폰에 시선을 박고 걷던 사람들이 사라질 일은 없을 거다. 다만 바라는 건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이 '앞'을 제대로 안 본 탓에 어딘가에 부딪치게 되고,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떨어뜨려서 액정이 박살 나는 거다. 이왕이면 떨어뜨린 스마트폰을 줍기 전에 또 다른 앞에서 오는 사람이 떨어진 스마트폰을 밟아서 2차 가해도 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