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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팸 구호 Aug 28. 2023

#6 네 멋대로 좀 생각 하지 마라

나는 사람들과 떠드는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함께 오랫동안 앉아서 떠들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마음이 편안한 곳이면 어디든 좋다. 얘기만 잘 통하면 술 한 모금 안 마시고도 10시간 넘게 떠들 수 있다. 실제로 그런 경험도 있다. 유익한 내용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10시간 동안 헛개수 하나 사다 놓고 밤새 떠들었던 그날은 아직도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하루로 남아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떠들 수 있었던 건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고 서로의 의견에 쓸데없는 자의적 해석을 덧붙여 마음대로 재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자나 예수, 부처 같은 성인이 아니라 어떤 의견에 '진리'라는 단어를 갖다 붙일 수는 없다. 실제로 내가 공자급 성인이라고 해도 뱉는 의견을 진리라고 못 박을 수도 없다. 사람은 다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다른 경험을 하며 자랐으며 다른 생각의 틀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오늘의 짜증은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은 무슨 마음대로 해석해서 몰아세우는 족속들에 관한 이야기다.


얼마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지인이 수개월을 열심히 준비해서 최신 유행하는 바디프로필 사진을 찍었다. 내가 한 때 화보 촬영이 업이어서 잘 볼 거라 생각했는지 나에게 사진 몇 가지를 보여주며 더 나은 사진을 골라달라는 것이었다. 요청한 대로 보여준 사진 중 더 나은 사진을 고르기 위한 과정에 돌입했다. 내게 보여준 사진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모두 괜찮았다. 하지만 100% 완벽한 사진은 없는 법이다. A라는 사진은 입 모양이 아쉬웠고 B라는 사진은 팔 모양이 아쉬워서 두 사진 중에 뭐가 더 낫다고 확언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요청 자체가 '내' 의견을 묻는 것이라 나는 자세한 의견과 취향을 담아 둘 다 괜찮은데 내 눈에는 B라는 사진이 A보다 좋다고 말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변이 황당했다. "둘 다 그렇게 별로야?"라는 것이었다. 지인은 어떤 사진이 어떤 이유로 좋다는 것보다 두 사진 모두 어떤 이유로 '아쉽다'라고 말한 데 꽂혀서 그냥 '별로'로 퉁 쳐버린 거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둘 다 99%가 좋고 아쉬운 부분은 1%인데, 그 1%에서 갈린 거라고 장난감을 조립하는 것처럼 하나하나 자세히 풀어서 다시 전달했다. 하지만 그 지인은 내 설명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다 별로라는 말로 밖에 안 들린단다. 결국 '알아서 해라'라고 말하고 설명을 포기했다. 그 지인은 '말 개 띠껍게 하네'라며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 사라졌다.


세상엔 이런 부류로 생각하는 인간들이 생각보다 많다. 내가 한 말을 다시 되돌아봤을 때 누가 봐도 부정적인 의도가 보이는 문장인 경우라면 저런 의견이 맞다. 그게 아닐 때, 이미 상대방이 머릿속에 모범 답안을 설정해 놓고 그 답안과 유사한 답변이 오지 않으면 '별로'로 치부해 버리는 '답정너'라면 어떻게 말해도 말이 안 통하는 상황이 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의견을 구할 게 아니라 차라리 '명령'을 하는 게 원하는 답변을 훨씬 얻기 쉬울 거다. 듣는 사람이 처음부터 명령으로 받아들이면 칼 같은 각으로 정확한 답변을 하려 매우 조심스럽게 3중 필터를 거쳐 근사한 답변이 나올 테니 말이다.


이런 사람에게 '해명'이나 '설명' 같은 단어는 설 자리가 없다. 그 자리는 오직 '변명'만을 위한 자리뿐이다. 무슨 말을 해도 본인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못한 '잘못'에 관한 변명이거나, 본인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든 '잘못'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는 대화를 이어나가기 힘든 게 아니라 불가능하다. 상대 의견을 존중할 생각은 한반도의 석유보다 없는데 그게 무슨 대화인가. 그들과 대화를 하느니 차라리 파계승의 재테크 강연을 듣는 게 훨씬 유익할 거 같다.


그렇게 상대 의견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정답을 내려 찍어 누를 거면 월북해서 정치인이나 군인 같은 걸 했으면 좋겠다. 그곳에선 그들이 말하는 모든 의견이 부정당할 일도 거의 없고, 혹 부정 의견이 나와도 지구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으니 얼마나 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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