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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쪽맑은물 Dec 17. 2023

둥글게 둥글게

2023 '제7회 서귀포문학작품 전국공모전'  수필 부문 수상작

  ‘70년 만의 서귀포 귀향’으로 이중섭 그림들이 서귀포로 왔다. 아이들 모습을 많이 그린 작가, 이중섭은 주로 탐스러운 복숭아와 해학적인 게를 그림 소재로 삼았다. 이중섭의 은지화는 서귀포와 관련이 깊은 소재들이 등장한다. 그중,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은 서귀포 바닷가를 떠오르게 한다. 천진하게 웃는 아이들 얼굴은 실눈을 뜨고 보아도 볼 수밖에 없는 감각이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동안 즐거운 웃음이 주렁주렁 열린다. 그들의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가 꽤 오랫동안 마음에 울려 퍼진다. 그 소리의 정체가 너무 다양해서 제법 뿌리 깊었던 우울도 흔들어 놓는다.

  각각의 이미지를 모아 새로움을 창조하는 예술가 기질은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감성과 굳은살처럼 단단한 마음의 결정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림 속 아이들이 깔깔깔, 까르르, 웃는 모습을 상상하니 작가의 어떤 기질에서 이런 작품이 창작되었는지 궁금하다. 동글동글한 아이들 표정에서 나의 기질은 무엇인지를 헤아려 본다. 거품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사르르 사라지는 나의 이야기는 어디쯤부터 존재해 왔을까. 마음 바닥에 뚫려있는 구멍에서 솟았다가 사라지는 기억 중, 한쪽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이 있다. 그 기억이 나를 형성한 기질의 단면이 아닐까. 어린 날, 둥글고 둥근 기억들이 그림 속 아이들 둥근 얼굴과 중첩된다.

  이중섭 작품은 이중섭 생각이다. 그 생각을 잘 알 수 없지만,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내 마음은  생각이니, 어떤 마음이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에서 내 마음과 결을 같이하는 동질성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어떤 작품은 무거운 어깨에 있는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어떤 작품은 튀어나온 돌이지만 거칠지 않고 매끄러운 것처럼, 어떤 작품은 오래된 다리 밑에서 만나는 이끼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이중섭 작품에서 웃음을 만나고 누군가는 우울의 근원을 만나고 누군가는 그 우울을 해체하는 방법을 만나는지도 모른다. 흙탕물에도 환하게 비추는 달빛이 보이듯이 이렇게 저렇게 이어져 온 삶을 생각할지도. 그의 작품 앞에서 내 얼굴을 생각한다. 가을밤, 한가위 둥근달에 비친 나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지구는 둥글고 달도 둥글고 그림에 보이는 아이 얼굴도 둥글고 내 마음도 둥글둥글한 밤. 낮에 보았던 이중섭 그림이 더욱 마음에 원을 그리며 다정하게 새겨지는 것은 한가위 달빛 때문이리라. 미래는 문이 활짝 열린 세계인 줄 알았던 날. 어두운 밤, 잘못 들어선 길에서도 달빛에 비친 그림자를 보며 금방 생각나지 않는 것들이 생각났던 날. 밤하늘로 향한 눈길에 마주친 둥글고 둥근 달빛이 너무 밝아서 화들짝 놀랐던 날. 낯에 나온 달을 따라가며 힘없이 골목길을 걸었던 날. 그 낯 달의 흰빛이 그리운 영혼 같아서 손가락으로 보고픈 마음을 그려보던 날. 그런 날들이 둥글게 둥글게 하늘에 떠 있다.

  달에 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달의 변화마저도 노래가 되었던 신비함은 다정함의 다른 말이다. 나에게 달은 저녁 다리 위에 나타나는 인연이다. 나에게 달은 떨어진 은행잎이 가득한 나무 아래를 바라보는 지극함이다. 나에게 달은 풀숲에 맨눈으로 확인이 어려운 작은 생명체 흔적이다. 나에게 달은 살금살금 책장을 넘기는 조용한 손의 표정이다. 나에게 달은 조심스러운 발걸음과 다섯 손가락의 생명력을 비추는 예찬이다. 나에게 달은 거칠지 않게 만물을 대하는 사람 마음이다.      

  ‘마리아의 숭배는 어른이 된 우리의 판단력과 책임과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유년 시절의 필요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는 알랭 드 보통(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청미래)의 글에서 이중섭의 동그란 아이들 얼굴이 떠오른다. 종종, 어쩌면 자주, 우리의 추론 능력과 용기와 재간조차도 무용지물이 되고, 어린이 같은 무력한 상태로 되돌아가 버릴 때가 있다, 는 작가의 글에서 유년의 나를 발견한다. 다양한 모양으로 다가오는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내면에 남아 있는 동그란 유년 기억은 무력해 보였기 때문에 그대로 존재하는지 모른다. 어떤 파괴 본능을 자극하지 않는 순수함이기에.

  사람 만나는 일도 재미없어지는 명절이 있는 것처럼, 말을 삼키기 위해 사람 만나는 일을 주저하는 것처럼, 도시로 흘러가는 사람 발길에 흥미를 잃는 것처럼 세상이 시시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러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조각품처럼 예술성이 가득한 삶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토끼를 새기고 계수나무를 새기고 무언가를 새기고 있는…. 달은 미완의 그 무엇을 새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꽤 오랫동안 달을 보게 된다. 무엇인지 모를 그 무엇은 유년의 얼굴처럼 진행 중인지 모른다. 이중섭 은지화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처럼, 어디로 향할지 모를 그들의 몸짓처럼.

  검고 긴 고압선의 무질서 속에서 가정마다 불을 밝히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검은 하늘에서 조용히 고압선을 비추고 있는 둥근 달에 마음이 닿는다. 빗금이 쳐진 마음 한구석까지 비추어 주는 달빛 음영은 금이 가고 헤지는 마음을 다독인다. 흐릿하지만, 사라질 수 없는 현실 문양에 달은 둥그런 빛을 보낸다. 그것은 그 언젠가 창문 밖에서 달빛이 풍성했던 풍경을 소환한다. 그것은 밤하늘에 달빛이 출렁이는 울렁울렁한 설렘이다. 태양에 의해 빛을 내는 것이 달 운명인 것처럼, 그 빛에 의해 설레는 마음도 운명일지도 모른다.

  남은 삶의 열매란, 남은 삶의 운명이란, 남은 삶의 인연이란 썩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고 부패하기도 하고 으깨지기도 하겠지만, 환하게 빛을 내기도 하고 은은한 향기를 내뿜기도 하고 간지럽게 속삭이기도 하지 않겠는가. 골목길을 지나 넓은 길로 나왔을 때, 낯설고 익숙한 것들이 지천인 세상에 속하고 있다는 것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사거리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며 바뀌는 신호에 반응을 보이는 발길에 안도하지 않겠는가. 상점 안 풍경이 내 마음 풍경 같다는 생각이 들면 무겁게 출렁이던 생각이 갑자기 가벼워지면서 슬며시 웃음이 나오지 않겠는가.   

  

  서귀포에서 이중섭과 함께 보내는 추석이 둥글고 둥글다. 70년 만에 귀향한 그림은 70이라는 숫자가 주는 오래됨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림 속 아이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의 무엇을 갈망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한다. 어렸을 때, 부드러운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손을 잡아주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부드러운 이들을 기억나게 하며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한다.

  몇십 년 만의 귀향은 아니더라도 귀향이라는 낱말은 이미 어른이 된 누군가에게 어떤 위안이 될 것이다. 달은 멀리 있지만 달빛이 가까이 느껴지는 것은 유년 기억이 가까이에서 빛을 내기 때문이 아닐까. 그 빛이 귀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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