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광상곡(狂想曲)
2024 [수필과비평] 9월호 원고
한 바퀴
오늘도 가벼운 걸음으로 시작하죠. 처음부터 빨리 걷고 싶지 않아요.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걷다 보면 점점 속도가 빨라지게 되어있어요. 내 몸이 자동으로 속도를 조절한답니다. 몸은 아직 형태를 결정하지 못하며 망설이는 시간을 알거든요. 형태를 결정하기 위해, 낯익은 시간에 도달하기 위해 몸이 외부 세계에 대한 열정으로 훌륭한 리듬을 감지합니다. 그러다 알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그때 멈추거나 다시 시작하거나 쉬면 돼요. 대여섯 바퀴 돈다는 건 꽤 많이 걷는 거지요. 그러니 천천히 시작하는 것이 좋아요.
피아노 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네요. 너도나도 피아노가 있는 시절이 아니었고 피아노 배우러 다니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었지요. 엄마를 졸라서 겨우 다니게 된 피아노 학원. 길을 걸을 때마다 무릎이 피아노 건반이 되어 손가락을 움직이며 다녔어요. 오른손, 왼손, 그러다 양손이 따로따로가 아닌, 동시에 움직였을 때, 상상으로 음을 즐기곤 했지요. 그러다「꽃밭에서」를 연주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양손으로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한 손 더하기 한 손이 아니라, 무한한 시간과 만물의 조화였지요. 두 손이 창조하는 예술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 가능한 것을 상상하게 하는 신들의 영역 같았습니다.
두 바퀴
몸이 점점 더워지기 시작하니까 속도를 내야겠어요. 더워지는 몸이 마음으로 전이되어 생각을 움직여요.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면 속도가 주는 즐거움을 더 느낄 수 있거든요. 산소 공급도 더 필요하지요. 피도 빨리 움직이고 생각도 빨라져요. 속도가 삶의 목표는 아니지만, 속도는 에너지가 되기도 하잖아요. 오래 미루어 두었던 쓰레기를 정리하는 것처럼, 오래 남겨 두었던 일을 결정하는 데 속도가 필요하지요. 결정이 다른 일을 시작하는 동기가 되는 것처럼요.
종강 모임이었지요. 피아노 있는 레스토랑에서 선배가 그 노래를 부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굳은 의지를 담고 있던 선배 눈동자가 왜 그날은, 그리 흔들린다고 생각했을까요. 굵은 목소리로 불안한 시대를 말하던 목소리가 왜 그날은, 가늘게 떨린다고 생각했을까요. 그 떨림이 애처롭게 들렸던 것은 아마, 나 혼자만의 느낌이었을 겁니다. 노래 부르는 선배를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옆에서 피아노 반주하던 P가 얼마나 부러웠던지요. 노래 「상록수」가 끝나갈 즈음, 아쉬웠던 마음은 눈을 감는 것으로 변주되었지요. 눈물을 머금고 있는 눈이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이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세 바퀴
속도를 많이 내야 합니다. 지금이 최고조거든요. 양팔을 귀까지 올렸다 내려야 해요. 그 동작은 팔 근육을 튼튼하게 합니다. 걷는 보폭도 굉장히 넓어지지요. 넓은 보폭으로 최고 속도를 내니 운동 효과도 그만입니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어야 해요. 그래야 호흡 조절이 되거든요. 바다의 파고가 잦아드는 순간이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엄청난 해일이 되어 대형 참사가 일어나겠지요. 조절해야 할 호흡이 멈춘다면, 삶도 멈추게 되겠지요. 세상 모든 이치가 호흡을 조절하는 것임을 그 누가 모를까요. 그런데 가끔, 잊어버릴 때가 있잖아요.
임신하고는 참으로 지루했어요. 태교도 중요하지만, 저도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피아노 학원에 다녔어요. 물론 갖고 싶었던 피아노를 샀지만 이미 피아노 있는 집이 많아졌더군요. 다시 바이엘부터 연습했어요. 그때 내 몸속에서 피아노 소리를 들었던 아이는 참을성부터 배웠을 거예요. 출산을 기다리며, 세상 밖으로 나올 때가 언제인지를 모르며 묵묵히 내 안에 있었던, 능숙하지 못한 피아노 소리를 들어준 아이가 그리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거의 날마다 피아노를 쳤던 내 손가락 움직임이 삶을 대변하고 있었지요. 그 누구 말보다 서툰 피아노 선율이 위로가 된 일상이었습니다.
네 바퀴
속도를 조금씩 줄여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날도 걸을 수 있어요. 하루만 하고 말 것이 아니잖아요. 정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항상 좋은 순간이 아닌 것처럼, 정점에서 내려가는 순간도 나쁜 것은 아니지요. 적당한 때를 알고 속도를 늦추어야 할 순간, 호흡도 고르게 내쉬고 팔이 움직이는 각도를 조금 줄이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지요. 그렇지 않으면 어깨나 다리가 아플 수 있어요.
어느새 아이가 많이 컸네요. 딩동댕, 서툰 내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자란 아이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배어 나오네요. 아이 뒷모습이 해같이 빛나요. 틀리는 음을 정정하고, 놓치는 박자를 바로잡는 아이는 손가락으로 몸과 마음을 조율합니다. 그런 아이 등을 감싸며 눈을 감습니다. 눈 감는 것이 버릇되었습니다. 여전히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은 눈물을 머금고 있는 눈이기 때문이지요.
다섯 바퀴
마지막입니다. 처음처럼 가볍게 걸어야 해요. 송송 나왔던 땀과 숨결이 타협하는 시간이지요. 속도를 줄여 가며 주변 풍경에 눈빛 뿌리는 것도 습관이 되었어요. 사물을 자세히 보는 일은 생각을 새롭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거든요. 오늘도 걷기를 잘했다는 만족감이 꽤 괜찮아요. 서늘한 공기는 발걸음을 차분하게 합니다.
다시 피아노를 배워볼까 해요. 정물처럼, 집에 있는 피아노가 심심할 것 같기도 하고 「꽃밭에서」나「상록수」를 연주하면서 시간여행도 하고요. 어린 시절, 무릎을 피아노 건반 삼아 연습했던 일을 떠올리며 살포시 웃는 것도 멋지지 않을까요. 앞으로 혼자 있는 시간에 피아노와 함께하고 싶은데, 글쎄요 너무 늦었나요. 말이 고플 때 손으로 피아노 감촉을 느낀다면, 허기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곡을 연주할까, 생각하니 피아노 건반 배열이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그 느낌이 일상을 어떤 형태로 만들지 가슴이 울렁입니다.
여섯 바퀴
마지막이 정말 마지막이 아닐 때가 있죠. 더 걷고 싶은 날이 있거든요.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싫은 것을 털어내기 위해, 미운 것을 맘껏 욕하기 위해, 과거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붙잡기 위해, 현재라는 존재 가치를 잃지 않기 위해, 미래에 피어날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 삶은 어디로 흐를까요. 내 심상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하루를 마주할까요. 내 의식은 가늠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을 붙잡을 수 있을까요. 내 마음은 참혹하게 일그러진 관계를 침착하게 만질 수 있을까요. 내 얼굴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에 반응할까요. 내 사랑은 그동안 한 일을 알고 있을까요.
피아노는 내 마음대로, 일정한 형식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삶을 연주하려 했던 나를 알고 있을까요. 어둡고 쓸쓸하고 무서운 생각에서 밝고 다정하고 즐거운 보헤미안 리듬으로 변화하려 했던 나를 잊지 않을까요. 쉼 없이 움직이고 꿈틀거리는 욕망으로부터 둥실둥실 하늘로 떠다니던, 더욱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노래했던 선율을 기억할까요. 그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