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질문하는가
2024 진천의 책 전국 글쓰기 공모전 최우수상
『1984』의 저자 조지 오웰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에 이런 글을 썼다. “기록된 역사는 대부분은 어떤 식이든 거짓이라는 말이 유행인 건 나도 안다. 나는 역사가 대체로 부정확하고 편향된 것이라는 말을 기꺼이 믿는 쪽이다. 한데 우리 시대에 와서 특이한 점은, 역사가 진실하게 기록될 ‘수도’ 있다는 개념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한 인물이다. 영국인이지만, 인도에서 태어난 그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식민국민과 제국주의 일원 경계에서 오는 차별에 대한 경험을 직접 체험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격정적이면서 냉철한 시각이 녹아있는 그의 글은 부조리한 인간 갈등이 패배로 얼룩진 삶이 되는가를 질문한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전체주의를 동물에 빗댄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혹시 내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인물과 닮은 부분은 없는지를 관찰하고 질문하게 한다. 보수와 진보, 남과 여, 이념과 종교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전쟁과 분쟁 같은 혼란스러운 역사에서 현재를 인식한다. 현재로부터 과거를 보는 것처럼 현재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최태성의 『일생일문』 (생각정원, 2021)은 단 한 번 사는 인생에서 어떤 고민을 해야 하는지를 질문한다. 고민이란, 먹고사는 문제를 기반으로 촘촘하게 연결된 모세혈관 같은 삶의 기록이다. 이 책에서 만나게 되는 낱말은 추상명사가 많다. 희망, 방황, 믿음, 가치, 변화, 한계, 극복, 성공, 위기, 비밀, 꿈, 현실, 시대 등등. 총 4부로 구성된 책은 질문하고(問), 듣고(聞), 길을 열고(門), 흔적을 남기는(紋)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누구로 살 것인지를 질문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타인에게서 듣고 변화가 시작되는 문을 열고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개인의 삶이자 국가의 삶이며 그것이 역사가 되는 길임을 친절하게 안내한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인 글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보면 우리가 전해 듣거나 알고 있는 사실이 의견에 의해 첨삭되고 각색된 것은 아닌지에 대한 궁금함이 의문이 되고 질문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 정말로 진실일까, 믿을 만한 근거인가, 의심하는 갸우뚱한 마음이 멈추지 않는다. 조지 오웰의 글을 곱씹어 보면, 역사는 편향되고 부정확한 것이지만, 진실하게 기록된 것이라는 믿음이 배경이 된다는 작가의 의견이 위안이 된다. 배경이 되는 믿음조차 포기한다면 세상은 그야말로 엉망이 아니겠는가. 믿음이 비록 침묵의 형태라도 텍스트가 되어 진실의 향기를 뿜어낸다면 침묵도 역사의 흔적이 아닐까.
역사를 좋아하지 않았던 학창 시절을 떠올린다. 너무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고 잔인하게 싸우며 공명정대함보다는 이익으로 점철된 난투극이 인간 본성과 인간이 만든 제도에 의해 편향된 욕망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구를 죽여야만 권력을 장악하고 억울한 죽음을 추도할 겨를도 없이 먹고사는 일에 눈치를 봐야 하는 일상이 참으로 속이 상했다. 역사 시간에 소설책을 읽다가 혼나기를 여러 번, 게다가 교무실로 불려 가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입시를 위해 연대표를 외우고 명칭을 외우고 뜻이 잘 전달되지 않는 낱말을 외웠다. 죽기 살기로 암기했더니 나름 괜찮은 성적을 받았다. 불행하게 그 이후 잊어버린 것이 남은 것보다 많았다. 그러다 역사에 흥미를 갖게 되는 계기가 찾아왔는데, 그것은 여행이었다.
여행은 모든 국토가 역사의 현장임을 실감하게 했다. 교과서로만 읽고 듣고 외우던 곳에 발길이 닿으니 그 현장에만 존재하는 유장한 이야기에 감복하며 애절해지는 나를 발견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굳이 이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참혹한 결과에 대한 또 다른 계획은 무엇이었을까 등등 끊임없는 질문이 생겼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비)와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학고재, 2008)를 읽고는 마음과 몸이 근질근질했다. 마음이 이끄는 장소로 몸을 움직였고 그곳에서 문화재를 만났으며 긴 시간을 살아낸 인간에 대한 존엄을 만났다. 문화재는 거짓일 수 없지 않은가. 굳이 유물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증거가 필요충분한 사실로써 문화재는 역사를 추념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무엇을 축약하거나 첨언할 필요 없는 문화재 자체가 역사임을 거부할 수 없었다. 물질 안에 깃든 정신과 의식을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생일문』을 읽으며 역사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거나, 지키고 싶은 것을 지켜내거나,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 편견을 깨거나, 비상식으로 일어나는 재난이나 변괴를 잠재우거나, 자유를 위해 투쟁하거나,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알리거나, 막강한 부와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존엄을 지키거나,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결국, 죽기를 각오하는 투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묵념하게 한다.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절대 두려워하는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이 감상적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을 모은다. 공염불이 되는 희망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참혹한 일이 쉬지 않고 일어날지라도 괜찮은 삶을 위해 정신을 모으는 근엄한 인간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한국 전쟁이나 일제 강점기, 삼일 운동이나 동학 농민, 홍경래 봉기와 신분과 성별 차별에서 오는 갈등을 기록으로 접하는 개인으로서 역사는 끊이지 않는 전쟁의 연속이라는 생각이다. 태평성대는 그저 말하기 좋은 낱말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해방 이후, 군부독재와 5·18 민주화 운동, 6월 항쟁과 촛불 집회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시끄럽게 만드는 정치 행보를 보면 낙관하기보다는 우울하다.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지금까지 피를 보며 투쟁해서 얻는 결과만으로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에 아직도 부족한 것인가. 더 많은 피와 죽음을 목도해야만 가능한 것인가. 교묘하게 감추고 편집하며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난무한 시대를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삶이란,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 그것은 자유다. 빼앗아도 안 되고 빼앗겨서도 안 되는 것이다. 엇갈린 운명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은 자유를 위한 투쟁이다. 지키고 싶은 것을 지켜내는 일, 말은 간단한데 실제로 참 어렵다. 하나를 지키기 위해 수십 가지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고 그것을 지켜내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갈 수 있다. (379쪽) 지켜 낼 수 없을 거라는 불안을 희망으로 바꾸기는 정말 어렵다. 이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 역사다. 세상이 유토피아가 아님을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그렇다고 디스토피아도 아니다. 어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는 심판이 해야 할 일이지만, 기울어진 시선으로 바라보는 심판은 소용이 없지 않은가.
디스토피아 세상을 염려했던 조지 오웰도 결국엔 “우리가 아무리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진실은 우리 배후에 엄연히 존재하듯 살아있다. 지구상의 일부가 정복되지 않고 남아 있는 한, 자유주의적 전통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라는 글을 쓰고 역사에 대한 진실을 포기하는 현재를 염려했다. 포기란 하려던 일을 도중에 그만두는 것이니만큼, 포기하는 순간 진실이나 희망도 없는 절망으로 향하는 것이리라.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자기 의무나 자격을 내던져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상황이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이라면, 기권하거나 단념하고 방기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다면 지옥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역사는 암울한 현재를 비추는 한 줄기 등불인 것처럼, 현재를 암울하게 만드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시작된 적개심이 진실한 등불 앞에서 환하게 드러나 몸 둘 바 몰라 도망치거나 사라지기를 바란다. 아무리 부인한다 해도 배후에 엄연히 존재하는 진실이 악에 정복되지 않는 자유가 역사의 기둥임을 증언하는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고통을 당하는 전쟁 같은 역사가 반복하면 안 되는 이유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존재했지만, 고개를 내밀지 못하고 사라진 이야기를 거리에서 만나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경험한 역사에 대한 염원과 환멸 조각으로 직조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역사란 과거를 현재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