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기다리지 말자, 시작을 해야 끝을 본다.
오지 않는 영감을 기다린다. 나이 드신, 할아버님 영감님 말고, 영감 inspiration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난 늘 영감을 기다려왔다. 뭔가 새롭고, 아주 획기적인,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무언가, 그런 영감이 짠하고 내게 와주기를... 그러다 보니 학부 시절부터 과제나 작업을 해야 할 때면 난 시작에 한참 뜸을 들였다. 리서치를 하고 아이디어를 여러 개 내보고 그래도 내겐 늘 부족한 느낌이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으면 뭔가 더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 같은 느낌. 그 좋은 아이디어만 떠오르면 나머지는 일사천리, 거의 다 된 밥이라는 느낌. 그 느낌에 취해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며 머릿속으로 생각만 한참을 했다. 영감을 줄만한 자료를 더 찾아보고 노트에 끄적이기도 했지만, 아직 내가 만들어야 하는 그 결과물 자체는 시작도 안 한 상태로 한참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데드라인이 코 앞에 다가와서야 아이고, 이제 안 되겠다 싶은 심정이 들 때서야 서둘렀다. 아직도 썩 성에 차지 않는 아이디어들 중 그나마 차선책을 골라 작업을 했다.
디자인 작업을 할 때도, 발표 자료를 만들 때도, 리포트를 쓸 때도 늘 그런 식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양질로 결과물을 급조하기란 쉽지 않다. 늘 후회가 남았다. 실제로 작업을 하다 보면 이 아이디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네 할 때도 있었고, 아이디어보다 이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늘 남은 건 아쉬움이었다. 하루만 더 있었으면 아니 하루 일찍 시작했으면 더 잘 살려볼 수도 있었을 텐데. 늘 이런 후회를 남기며 다음엔 이러지 말자라고 다짐하곤 했다.
하지만 역시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최근에 회사에서도 나는 이 패턴을 또 반복하고 있었다. 신규 서비스를 기획해야 해 여러 동료들과 디자인 쪽에서는 나와 미국 동료 두 명이 투입되었다. 어느 정도 사용자 조사를 하고 나니 대충 어떤 서비스여야 한다는 감이 왔다. 클라이언트에게 우리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아이디어를 시각화한 예시를 몇 개 만들어야 했다.
다른 서비스들 중 좋은 사례를 꼽아 참고하려고 했는데 꼭 들어맞는 비슷한 서비스를 찾을 수 없었다. 우리가 내놓을 이 서비스가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라니, 기획 자체에 힘이 실려서 좋았다. 하지만 이 말인즉슨 어떻게 구현할지는 온전히 우리의 결정에 달린 것, 뭐가 좋은지 나쁜지 모두 우리가 정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한 가지 기능을 구현하더라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은 수십수백 가지인데 뭐가 맞는 것일까 나는 또다시 기다림의 늪에 빠졌다. 종이에 이런저런 스케치를 해보았지만 그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뭔가 대단한, 뭔가 더 새로운 아이디어가 번뜩 찾아올 것 같은 느낌으로 며칠이 지나갔다.
그런 반면 미국 디자이너의 접근 방식은 훨씬 단순했다. 일단 내일까지 00 부분에 대해서 디자인 안을 두세 개 가지고 올게. 그다음 00 부분은 그다음에 얘기해보자. 알겠다곤 했지만 속으론 회의적이었다. '이거, 보기보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심사숙고해서 생각해도 솔루션이 나올까 말까인데. 00, 00 이렇게 쪼개면 잘 될 리가 있나'
다음 날, 미국 디자이너가 가지고 온 스케치는 매우 매우 단순화된, 초창기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워낙 서비스 자체가 복잡하다 보니 스케치 자체가 단순해도 그렇게 큰 그림에 대해서, 또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 스코프를 나누어 적절한 대화를 할 수 있었고, 다들 생각만 들고 모여 그냥 얘기만 할 때보다 빠르게 진전할 수 있었다. 그중에 더 좋은 안을 뽑을 수 있었고, 정말 아닌 것들도 아니라고 이미 제외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나도 생각했던 아이디어였기에 나는 어떤 과정으로 이 아이디어가 나왔는지, 왜 고민했는지 그 뒤에 깔린 생각들이 보였다. 나도 했던 생각이라는 게... 구차한 변명 같지만 정말이었다. 내가 들인 고민과 생각의 시간들, 잘해보려고 했던 내 의욕까지... 이걸 꺼내서 보여줄 수도 없고… 뭔가 억울하기도 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미국 디자이너에게 한 수 배웠다. 기다림의 늪에 잘 빠지는 내게는 좋은 푸시였다 - 단순하게 생각하고 시작하는 빠른 실행력, 일단 해보고 아니면 제치기.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회사는 함께 일하는 곳이라는 것. 얼른 해보고 함께 얘기하고, 함께 결정하면 된다. 나 혼자 뭔가 대단한 걸 해보겠다고,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러면 안 된다. 회사는 내 기다림을 기다려줄 여유가 없다.
그러니 오지 않는 영감은 이제 기다리지 말자. 언제 내뜻대로 와준 적이라도 있었던가. 펜을 들고, 마우스를 들고, 뭐라도 쓰고, 그리고, 만들자. 시작이 반이자, 시작을 해야 끝도 있다! 당연한 깨달음을 내 나이 서른이 넘어서야 얻어 가지만... 내겐 의미가 남다르다. 어떤 해방감까지도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런치에 글을 쓰자며 흘러 보낸 시간이 또 한참이기에 괜히 멋쩍다. 하지만 이렇게 글 한편을 완성했으니 오늘부터 또 시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