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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Oct 24. 2019

담백하거나, 힘 빠지거나

pr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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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거나, 힘 빠지거나




열정을 강요 하/받던 시대에 질려버린 '요즘애들' 출신의 우리들은 이제 모두가 대충 살거나, 힘을 안 들이고 살고 싶어 한다. 일은 하기 싫은데 돈은 많았으면 좋겠고, 꿈이고 나발이고 귀찮아 죽겠는데 자꾸 꿈을 물으니 생각해보자면 그것은 로또 당첨이오, 이 한 몸 건사하면 그만이니 결혼도 원치 않는다.


고소한 우유가 들어간 라떼를 참 좋아하시는 적잖은 어른들이 '라떼는 말이야' 하고 조언을 해주시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의 경험(즉 남의 얘기)에 귀 기울일 기력 조차 없는 우리는 결국 그 귀한 말씀들 마저 잔소리 취급을 하고야 만다.


야, 요즘은 예전이랑 다르게 열심히 하고 싶은 게 없다. 너도? 나도 그래. 낮에 만난 친구들과 이대로 죽겠노라 노래를 부르다 그대로 그러다 밤이 찾아오면, 불현듯 찾아오는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어쩌지. 한 번 사는 인생, 녹을 대로 녹아 심지만 남은 촛불처럼 살 수는 없는데.



copyright 2014. 동경(insta@id1992) all rights reserved. [터키/카파도키아]



나의 20대 초반은 그야말로 멈추지 않는 경주마와 같았다. 24시간이 모자란 건 선미가 아니라 나였다. 지금이야 콧바람에도 꺼질까 걱정되는 한 줌의 불씨와 같은 상태이지만, 당시에는 마치 LED 스탠드와 같았달까. 무언가를 함에 있어 주춤거릴 시간 조차 아까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르던 때가 있었는데.


그렇게 달리다 보니 19살, 학교에 소속돼 있던 교회의 작은 방에서 적어 내린 20대 버킷리스트를 27살에 거진 다 이루어버렸다. 클럽에서 남자 꼬시기, 동국대학교 합격하기, 돈 많이 벌기, 세계 일주하기, 서른 전에 책 내기 등등. 결승선을 통과하고 나니, 길을 잃었고, 여전히 그러한 상태다.


사실, 나란 인간 자체는 남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워낙 이것저것 배우고(시작은 방대하나 그 끝이 아주 미약한 경우가 바로 나다.), 돌아다니길 좋아해서 때때로 일정이 없을 때에 겨우 느껴보는 심심함이나 멍-함이 아주 강렬하게, 그리고 달콤하게 느껴질 뿐이다.


지난 책을 출간한 후로 1년 반쯤 흐른 지금, 나는 뉴질랜드의 작은 마을에서 지내고 있다. 이곳에서의 삶은 뭐랄까, 몸이 편한만큼 머리가 복잡하다고 해야 하나.


무슨 말인가 하면, 최근 서점에서 너나 할 거 없이 외쳐대는 주장과 달리 단연코 나는 대충 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뭔가를 할 에너지가 있는 건 또 아니다. 뭐라도 하던가. 아니면 그냥 대충 살던가. 둘 중 하나만 하면 참 좋을 텐데, 내 팔자 내가 꼰다고 이 좋은 곳에서 편히 있지 못하고 (한국에 비해 노동이 적을 뿐, 놀고 있는 건 아니다.) 틈틈이 머리를 쥐어뜯는 중이다. 어쩌면 아무것도 안 하긴 싫어서(?) 뉴질랜드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요즘 나의 최대 고민은 그저 내 남은 에너지를 어디에 쏟아낼지 찾는 것이다. 글? 사진? 아니면 새로운 것에 대한 무모한 도전? 아, 요즘은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던데. 난 결혼도 안 할 거고, 애도 안 낳을 예정이라 남들보다 천천히 늙을 텐데. 그럼 앞으로 최소 50년은 더 살 텐데 이렇게 심심하게 살 순 없지. 하지만 전처럼 다시 달릴 힘은 없는걸.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버킷리스트를 다 이룬다는 건 마냥 행복한 일은 아닌 거였어.

아참, 나 동국대를 못 갔구나.

그럼 말로만 듣던 만학도 전형에 응시할 절호의 기회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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