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래도 되는 거야?
우리 이래도 되는 거야?
언니, 나 요즘 걱정이 없어
긴 여행을 마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어느 날. 한껏 그을린 피부와 투톤을 넘어 서너 가지의 색이 뒤엉킨 머리칼, 그새 유행이 지나버린 옷가지들은 마치 지난날의 훈장처럼 한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불과 며칠 전 까지만 해도 나는 이 모습 이대로가 잘 어울리는 길 위에 존재했는데, 이제는 매일 밤 몸을 뉘일 바닥과 향기로운 배게가 있는 이 곳과 사뭇 이질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는 듯했다.
당시 나는, 가득하던 시간이 사라진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행할 때에 비해 이렇다 하는 것은 없는데(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왜인지 매일 시간이 모자랐다. 긴 시간 동안 간절히 상상하던 모습 안에 보란 듯이 내가 있는데, 희한하게 머리는 공허하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그때에는 글은 고사하고 생각이란 것 자체를 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안 썼고, 안 했다, 가 맞겠다. 등 따뜻하고 배 부르니 걱정이 없고, 걱정이 없으니 생각을 잘 안 하게 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형태였다. 한 삼 개월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겠노라 다짐하고 나니 서두를 일이 없었고 조급하지 않으니 마음이 평온했다.(감사하게도) 가족들은 내 의견을 존중하고, 친구들은 격려하며, 얼굴 모를 누군가는 나를 응원하니 어느 분위기에 휩쓸릴 일이 없었다. 당장에 큰돈 들어갈 일이 없으니 간간히 아르바이트나 할까 싶어 집 근처에 일을 구했는데, 서울은 내 고향이 아닌지라 크게 신경 쓰이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날에 문득, 아 나 요즘 너무 걱정이 없네. 싶었다. 일을 마치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데 때마침 밤늦게 일을 마친 동거인의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무심코 한 마디 했다.
"언니, 나 요즘 걱정이 없어."
"한잔 하자."
동거인과 나는 글을 즐겨 쓴다. 종종 서로의 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어느 주제에 대해 곧 잘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대화를 할수록 느끼는 것은 동거인과 나는 참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같은 걸 좋아하진 않지만 비슷한 걸 싫어해서 가까워진 케이스란 것이다. 하여간 그런 동거인이 다행(?)히 내 이야기를 듣더니 본인도 요즘 같은 심정이라 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삶에 큰 걱정거리가 사라져 머릿속이 뻥 뚫린 것처럼 멍하다고 했다.
걱정이 없다는 거. 누군가에겐 배부르기만 한 소리일 테지만, 나는 머릿속에 물음표가 멈추질 않았다. 그것이 과연 좋기만 한 일인가? 만약 걱정 없이 살아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다시 말해 늘 어느 정도의 걱정거리를 갖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걱정의 해방은 생각보다 달갑지 않은 일일지 모른다. 오히려 길을 잃게 만들지도. 감히 예상컨대 적잖은 아버지들이 은퇴 후 느끼는 비스무리한 감정과 같지 않을까. 그런의미로 '적당한 걱정'은 나와 동거인 같은 류(?)의 인생에 살아가는 이유를 만들어주고, 더 나아가 자아존재감에 꽤 큰 기여를함이 분명했다. 물론 '적당하다'는 기준이 모호하고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게 당연한 일이라 해도 적어도 나는, 그리고 동거인은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이렇게나 마음이 평온해본 적이 없어서, 누군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날을 지내본 적이 없어서,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어색해서 우리는 결국 술 한잔에도, 새벽 세시가 넘는 시간까지 이어진 대화에도, 이러한 시간을 어떻게 유연히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내리지 못했다. 어쩌면 적어도 이 물음에 대한 종지부를 찍는 일만큼은 온전히 우리 스스로의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걱정이 없는 게 걱정인 삶.
그 날의 술은 참 쓰지도 달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