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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Nov 16. 2019

3.3%과 맞바꾼 순수함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3.3%과 맞바꾼 순수함





지난겨울, 모교에서 강연 제의가 왔다. 사실 몇 해전부터 계속 들어온 이야기지만 당시에 한국에 있지 않았던 터라 드디어(?) 응할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수능을 마친 다음, 곧이어 수험생 운명을 이어받을 2학년 친구들과 신입생 친구들을 대상으로 '직업'에 대한 다양성과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리였다. 나는 당시 '여행작가'라는 직업으로 강연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한 번도 스스로의 직업을 여행작가라 정의 내려본 적이 없던 터라 적잖이 뻘쭘한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강단에 서는 것은 늘 설렘과 긴장을 동반하지만, 그 규모와 상관없이 손발이 차가워지고 먹은 것도 없이 배가 아픈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다. 당일날 새벽, 나는 아픈 배를 움켜잡고 고향으로 내려와 익숙한 노선의 버스를 잡아 탔다. 수능 직후여서 그런가, 재수까지 한 나에겐 꽤나 께름칙한 공기였다. 나는 마치 금의환향이라도 한 듯 편의점에 들러 주스 세트를 하나 사들고 교문에 들어섰다.


나는 학교에 대한 애정이, 학창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아주 깊은 편이다. 성적보다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행위 자체에 만족을 하며, 재미있는 것에 관심이 많던 나는 전교회장 선거 출마부터 (물론 낙방했다), 축제에 나가 대상을 타기도 하고, 학교 교회에서 베이스를 담당하기도 했다. 예체능이었던 나는 수능시험 후 바로 분당으로 올라가 실기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부장 선생님이 수능 후 시에서 개최하는 축제에 우리 이름을 맘대로 올리시는 바람에 나는 한 겨울에 오직 춤을 추기 위해 분당에서 온양까지 내려와야 했다. 재수를 결심한 후에는 선생님들의 배려로 한 학년 아래 수험생 친구들의 야자 감독을 했었고, 간간이 문제집과 모의고사 시험지를 받아 풀곤 했다. 이러한 추억들은 나의 몸과 마음을 틈 없이 살찌웠고, 평생이 가도 빠지지 않을 추억 살 탓에 나는 소중한 연차를 사용하여 평일 새벽 온양까지 한걸음에 내려오게 된 것이다.


나의 모교의 경우 다행히(?) 사립학교인지라, 은퇴가 아니고서는 웬만하면 모든 선생님들이 그대로 계시다는 큰 장점이 있다. 독립출판부터 정식 출간까지 책이 나오면 나는 늘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담임선생님께 찾아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선생님의 눈빛은 꽤나 소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나보다도 곱절은 더 생각이 많아지시지 않았을까, 감히 예상해본다. 강연 당일에도 나는 가장 먼저 담임 선생님을 찾았고, 오늘 대충 누가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준비한 자료를 연결하기 위해 강연장에 도착하니 여럿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은 소름 돋게도 똑같았다. 우리는 '엄마야, 대박'이라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한 리액션으로 서로를 반겼다. 


우리는 저마다 준비한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전한 후, 강연장을 빠져나와 점심을 함께했다. 몸집이 작아 다람쥐 같던 친구는 뒤에서 보면 제 뒤통수가 보이지 않을 만큼 큰 suv를 몰았다.(그녀는 실제로 그 이유로 경찰이 불러 세운적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 차를 얻어 타고 근처 식당으로 이동했다. 


"야 매운 거 먹자, 여기 고추 그려져 있잖아 고추. 고추 그려진 거 달라고 해."

"저기요- 직원님! 여기 가장 고추 큰 걸로 주세요! 매운 걸로요!"

"많이 고추인 게 있으시고, 적당히 고추인 게 있으신데 어떤 걸로 드릴까요?"


직원분은 아마도 우리의 정신없음에 휘둘리신 듯했다. 하여간 우리는 돈 쓸데가 없으니 제발 많이 좀 먹어달라는 선생님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쉼 없이 먹으며 그간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분은 은퇴를 하셨고, 어떤 분은 교감직에 오르셨으며, 나름 가장 젊은 선생님 축에 속했던 어떤 분은 벌써 딸내미가 뛰어다닌다고 했다. 우리는 소식 하나 당 최소 5분 이상의 리액션으로 선생님의 진을 잔뜩 빼놓았다. 선생님은 우리의 끊임없는 수다에 어쩜 이렇게 그대로냐, 며 혀를 차면서도 언제 이렇게 컸냐, 고 입가에 미소를 거두지 않으셨다. 그러다 나는 머릿속에 불현듯 든 생각 하나를 쓱, 꺼내 물었다.


"야, 은지야 그래서 강연비에 세금은 얼마나 떼냐?"

"아마 3.3% 일 걸?"
"그래? 하긴 10%는 너무 했다. 벼룩에 간을 빼먹지"

"나 작년에도 했는데, 3.3%이었던 것 같아"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담임 선생님은 기가 찬 듯 말씀하셨다.


"놀고들 있다"


축제에 나가 쪽을 팔고 얻은 인기와 상금을 모두 치킨과 탕수육에 쏟아부었던 10년 전과는 달리 우리는 소득을 대하는 자세가 바뀌어 있었다. 마치 어제 졸업한 것처럼 똑같은 얼굴을 하고, 똑같은 추억을 대하고 있는데 우리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던 것이다. 과연 지금의 나에게 얼마가 될지 모를 수고비를 모두 치킨이나 탕수육을 사 먹는데 쓰라고 한다면, 흔쾌히 그러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마치 욕쟁이 할머니가 외상 손님에게 급 존대를 하듯, 애정과 추억과는 별개로 돈은, 돈인. 그저 그런 어른의 표본이 되어버렸다. 어쩌다 나의 순수함이 이리 흐려졌는가. 아, 이러한 내가 조금은 안타까웠다.


며칠 후, 강연 전 적어낸 계좌에 소정의 강연비가 들어왔다. 엥. 왜 다 들어왔지?

그렇다. 우리의 순수함과 맞바꾼 강연비의 세금은 기타 소득으로 (2018년 기준) 일정 금액 이하로 "비과세"였다. 

그야말로 빛났다 사라질 돈, 그쯤은 기꺼이 기부도 할 수 있다며 허세나 부리고 명예라도 남길 걸 그랬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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