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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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공개적인 공간에, 가장 은밀한 일기
몇 해 전, 일본행 비행기 안에서 흩날리는 생각 뭉텅이들을 풀어 적다가 문득, 옆에 앉은 이름 모를 승객이 내 글을 쳐다볼까 봐 멈춘 적이 있다. 나는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한글을 읽을 줄 아는지 모르는지도, 하다못해 지금 내 옆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으나 그의 존재만으로도 나의 집중력은 계속해서 흐려졌고 결국 정체모를 낯 부끄러움에 노트를 닫고야 말았다.
어쩌면 일기란 나에게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을, 이 기억을 잊고 살아갈 훗날의 나를 위해 쓰는 것임에도, 우연찮게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것이 두려워 A4 세 장 짜리 분량의 생각을 단 몇 줄로 줄여 쓰고야 마는. 마치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전하는 편지가 중간에 분실될 우려를 감안하여 암호로 가득한 편지를 쓰는 듯한, 그런 느낌의 존재.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읽혀질 것을 미리 염두 해 솔직하지 못한 일기.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기록되어야 할 개인의 공간조차 온전히 내 것이 아님에서 오는 허탈함을 나는 아주 잘 알았다. 그럼에도 소위 "날것"의 진솔함이 내게는 없었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삶 속 그 어떤 용기보다 스스로에게 솔직한 용기가 부족한지도 모르겠다.
*
작가라는 직업이 내 이름 뒤에 붙은 어느 순간부터, 아니 사실은 훨씬 그전부터 나는 어떤 자리에서도 리스너이기보다는 그 반대에 가까웠다. 친구들끼리 술 한잔 기울이는 자리에서도, 여행자들이 삼삼오오 모인 호스텔 로비에서도, 결혼식장에서 만난 동창들과의 식사 자리에서도, 타 회사 직원들과 함께하는 회식자리에서도, 하다못해 면접 자리에서 까지도 나는 대화를 함에 있어 나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꺼내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유독 껄끄럽고 낯부끄러워하는 주제가 하나 있었으니, 그 건 바로 '사랑타령'이었다.
노래로, 영화로, 드라마로, 책으로 남의 '사랑타령'은 잘만 듣고, 보고, 읽으면서 내가 하는 건 왜 이리 어려운 건지. 사랑은 나를 때로는 찌질하게, 주로 행복하게, 이따금씩 근사하거나 답답하게 만들었지만 나는 그것을 좀처럼 누군가에게 티 낼 수 없었다. 보이는 곳에 적는 것은 가당치도 않았고, 암호로 가득한 일기장에 적는 것조차 부끄러워 몇 자 적지 못했다.
여행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에 대해서는 책 한 권을 가득 채울 만큼 할 이야기가 많았음에도, 지난 몇 년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에,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기 위해, 내가 주고 싶은 것이 아닌 그가 받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시간과 과정에 대해서는 좀처럼 적을 수 없었다.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여행이나 사랑이나 매한가지인데도, 무슨 이유에서 내 손끝은 그리도 움직이지 않았던 건지.
오직 사랑만을 위해 지낸 시간이 벌써 몇 해가 흘렀지만, 무엇이 나의 '사랑타령'을 가로막는지 애석하게도 나는 여전히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다만 이제는 최갑수 작가의 '우리는 여행 아니면 사랑이겠지'라는 말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을 하지 않는 나는, 사랑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반대로 어느 날 사랑을 하지 않는 나는, 여행 없이는 설명할 수 없게 되겠지.
이다지도 힘들 줄 몰랐던 나의 '사랑타령'
누군가 볼까 두려웠던 일기장에 날것의 진심과, 진실을 담아.
나는 앞으로 이토록 공개적인 곳에, 가장 은밀한 이야기를 적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