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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우주나 Feb 25. 2019

글쓰기와 비루한 줄다리기

글쓰기와 계획을 유비하기

* 주의, 이 글은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이지 글쓰기에 대한 글이 아니다. 비문과 비형식, 감정 소요가 넘쳐나는 글일지도 모른다. 흔히 좋지 않은 글을 쓸 때 그렇게 한다고 하는 것들 말이다. 

** 이 글은 정답도, 대답도 아닌 읊조림을 담았다.


 하나의 문장에는 하나의 뜻이 아니라 여러 맥락이 들어 있다. 그 맥락들 사이에서 하나의 결을 잡아 놓는 일을 글쓰기라고 한다. 지난 1년 하고 3달을 글을 쓰지 않았다. 이 시간 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안개가 껴 있는 곳은 나의 주변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다. 언제나 그랬듯, 그 시간은 안갯속에 있지만 근래에 더욱더 짙어진 것만 같다. 맥락을 잡지 않은 날들에는 뭉텅이 같은 시간들이 있다. 그 시간은 자를 수 없어서 그저 그대로만 있다. 자를 수 없는 맥락은 어쩌면 맥락이 아니다. 맥락을 한 결로 잡을 수 있다면 다른 결로도 잡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잘린 맥락은 그 성질상 맥락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뭉텅이가 있다. 그리고 뭉텅이가 맥락이 되기 위해서는 계획이 필요하다.


 그리고 계획이라는 것은 언제나 깨어지기 마련이다. 

 뭉텅이 속의 나는 종종 글쓰기를 계획했다. 그 유명한 하루키의 이야기에 따르면 글이 써지건 써지지 않건 앉아 있어야 한다. 그를 따르고자 했다. 이 경우는 습관에 관련된 이야기다. 그에게는 글을 쓰는 습관이 있다. 습관에 관하여 누군가는 두 달을, 심지어는 반년을 꾸준히 해야만 습관이 생긴다고 한다. 짧게는 두 달 동안 하나의 일을 반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는 하루키의 반복에는 단순함이 아닌 복잡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단순 반복보다 복잡다단한 편이 실현 가능성이 높다. 계획은 하나의 맥락을 잇고자 하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계획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의 차례를 따른다. 단계적 목표의 달성을 통해 계획은 점차 실현된다.

 단계적 목표가 없는 반복적 목표라면 너무나도 쉽게 매너리즘에 빠지곤 한다. 저명한 작가들이 자신을 고통스러운 환경에 두고 글쓰기를 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그들의 예술성이나 괴짜다움을 높이는 별난 짓이 아니라 스스로 새롭게 하기 위함이다. 일상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을 개입시킴으로써 새로운 감각을 자신에게서 찾고자 한다. 매너리즘을 저해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을 악취와 불편한 자세, 고통으로 괴롭힌 것이다. 단순한 반복에 성공하여 습관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 습관은 그 이상으로 가기가 어렵다. 아니면 10년이고 20년이고 하나의 작업을 반복하여 그 작업에 장인의 숨결을 불어넣는 과정이 필요하다. 집중의 상태에서 고도로 예민한 감각을 살려 작업을 지속하는 것이다.

 복잡함의 비밀은 계획의 단계성에 있다. 하나의 작은 목표, 오늘 글을 쓰겠다. 혹은 지금 두 시간 동안 이곳에 앉아서 한쪽의 글을 쓰겠다. 하는 더 작은 목표까지 잡는 것이 중요하다. 수천 번을 다시 써도, 수만 번을 수정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글이다. 글의 맥락은 너무나도 많은 결이 있어서, 한 글자가 열 문단의 글을 바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범람하는 결에서 글을 잡는 방법은 같이 흘러가는 방법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그저 흘러가면 될 일을, 하나의 단계는 굳건한 영향력을 미친다. 어느 정도 글이 써지기 시작하면 하나의 형상이 나타난다. 다른 말로 '스타일'이라고 하는 이 형상은 어느 곳에나 자리 잡기 시작한다. 

 글의 생기는 그 글을 읽는 사람이 느끼는 체온과도 같다. 좋은 글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열기를 미친다. 그런데 스타일이 생기면 글에 하나의 틀이 생긴다. 이 틀은 어떤 내용을 넣더라도 준수한 결괏값을 가져다준다. 물론 이것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이 이 '도구'는 새로운 작업 방식을 가져온다. 고정화, 고착화 그리고 효율성의 극대화라는 방식 말이다. 이 과정이 손에 익기 시작하면, 비슷한 글들이 손에서 쏟아져 나온다. 이것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 생기와 지루한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형식과 내용 사이에 긴장감 없는 마찰은 글에 생기를 불어넣지 못한다. 글쓰기의 시간은 비약된 채 마무리된다. 풀어야 할 것, 분석해야 할 것은 귀찮은 일들을 몰고 오는 폭풍과도 같아 맞서지 않게 된다.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그곳으로 나아가야 한단 말인가. 몽상으로 채우던 공간에는 숨죽인 채 차가운 철골이 들어선다. 철골 속에서 몽상은 온기를 잃는다. 온기를 잃은 몽상은 형식에도 내용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공정을 거친 결과물이 손에서 생산된다. 기능은 온전하다. 그래서 마찰이 없다. 유연하게 글이 써질수록 글을 쓰는 일은 쉬운 일이 된다. 그것이 쉬운 일이 되면 나는 어려운 글쓰기를 하지 못하게 된다. 굳이? 그리고 쉬운 일이 되면 나는 쉬운 글쓰기가 무료하다. 글쓰기가 결과물을 손에 쥐여주면 나는 그것을 받아서 쓸 뿐이다. 매너리즘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무료함으로 젖어 들어다가 나는 무기력해진다. 나는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써지는 글을 받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계획이란 무의미하다고?


 계획이란 아직 오지 않은 맥락들이다. 있지도 않지만 있을지도 모르는 맥락들을 간추려 보는 일이다. 그리고 분해할 수 없는 맥락과 있지도 않은 맥락은 크게 다르지 않다. 뭉텅이 같은 시간과 보이지 않은 시간은, 그저 현재의 입장에선, 자신의 좌우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무한히도 부단한 현재에 있다. 이것은 언뜻 미래를 향한다고 비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현재는 끊임없는 과거와 미래의 조우이다. 현재하는 한 과거의 갈퀴와 미래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뭉텅이 같은 시간을 유영하며 나뒹굴고 던져진다. 한낱 싸라기가 우주를 유영하듯 우리의 여행은 너무나도 허하다. 끝을 알 수도 없는 현재는 그저 흩날린다.

 그리고 계획은 다가오는 현재를 위한 일이다. 흩날리는 현재들에서 맥락을 잡아내는 일이다. 계획은 전체를 관망하지는 못하지만 특정한 맥락을 짚어내는 든든한 근간이 된다. 근간은 새로운 맥락을 추가하거나 뺄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고 맥락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것에 기초가 된다. 좋은 맥락은 좋은 근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뼈대는 글쓰기의 공간을 마련한다. 계획은 뼈대와도 같다. 행위가 목표하는 하나의 지점으로서 계획은 유능하다. 공간으로서 글쓰기는 자신의 집을 마련하고 그 집 속에서 스스로 살아난다. 자생하는 글쓰기의 공간은 그 자체로 온기를 가진다. 

 계획은 그 자체로는 굳은 것이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새롭다. 계획을 통해 재현된 글은 언제나 계획보다 앞서 있으며, 계획의 모양새를 온전히 나타내지 못한다. 청사진은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결과물이 될 가능성을 가득 쥐어진 채 계획은 맥락의 결을 추린다. 새로운 것들은 계획을 만나며 부딪히고 찢어지거나 결합한다. 충돌을 통해 결과물은 자신의 집을 짓는다. 상황에 따라 재료는 바뀌곤 한다. 언제나 하나의 설계가 처음부터 끝을 결정한다면 우리가 집을 지을 필요가 무엇인가? 글은 쓰는 과정에서 스스로 자생하는 길을 찾는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글 쓰는 사람의 위치이다. 글 쓰는 사람은 마치 건축가와도 같이 계획하여 글을 써나간다. 자신만의 설계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을 글쓴이는 자신의 글에 재현하고자 노력한다. 이것은 다만 그의 경험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그가 느낀 것들에 대한 재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현이 끝나는 순간 글은 자신만의 영역에 위치한다. 마치 1시간 전부터 15분 전까지를 찍은 영화처럼 그 시간에 오롯이 존재한다. 그것은 다시 돌아볼 수 없는 닫힌 기억이면서 영원히 향유할 수 있는 열린 기억이다. 즉, 그 시간을 오롯이 다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영원히 그 시간은 환기되는 열려 있는 틈을 제공한다. 닿을 수 없는 향유의 끝에 글쓴이는 글을 마주하게 된다. 한 때 자신의 일부 혹은 자신이었던 그 글을.

 

부서지는 간극에서 줄다리기


 글을 쓰는 방식이 만들어졌거나 만들어져야 하는 상황에서 글쓰기는 줄다리기와 같다. 계속해서 부서지는 형식과 굳어지는 내용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하나의 글이 배태된다. 형식과 내용은 본디 하나이면서도 상이하여 언제나 간극을 형성한다. 좋은 글은 그 간극을 감추거나,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처럼 보이거나, 구별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글쓰기에는 스타일과 계획이라는 상이한 힘이 필요하다. 매너리즘과 불확실한 내용의 충돌은 언제나 열린 구조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무너져 내리는 구조와 뚜렷해지는 현상의 충돌, 그리고 번쩍임 속에서 잠시 반짝인다.

 이 반짝임을 들여다 보아라. 자신에게 내재한 간극의 치열한 마찰을 견디고서 태어난 별을 보라. 그 속에서 생겨나는 것을 음미하라. 그리고 그 영향력을 그 온기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며 글을 써내라. 온 우주가 힘을 주진 않겠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배울 것이 많을 터이다. 고정되길 주저하지 않는 형식에 새로운 내용의 마찰을 일으키고, 할 수 없는 것들을 사실화하려는 내용에 형식이라는 찬사를 보내라. 치열한 줄다리기 속에서 조금씩 기울어지고 흔들릴 것이다. 그러니 글을 쓰자. 제발 좀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들은 크게 불타오른다. 끝을 맞이하는 초신성은 그야말로 세계의 빛만큼 밝게 작열한다. 그것은 온 은하의 빛만큼이나 밝게 타오르는 것이다. 글은 마치는 순간 하나의 빛이 된다. 그 순간 우리는 한낱 싸라기에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 정열적으로 타오르는 싸라기의 빛은 어쩌면 온 하늘을 덮은 노을과 함께 빛날지도 모른다. 혹은 노을 속의 싸라기에 불과할지라도, 빛에 빛을 더하고서야 초신성처럼 작열하는 끝을 맞이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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