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그린북>
선입견과 차별의 상관 관계
선입견은 얼마나 강력한가? 추상적이라면, 질문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먼저, 선입견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선입견은 대상보다 앞서 내려진 견해 혹은 판단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입견은 대상보다 먼저 온다. 대상과 마주하는 시점보다 앞서 있어야만 한다. 대상보다 앞서 있는 관점은 그저 색안경이 아니다. 눈 앞을 가리는 것이 아니다. 즉, 선입견은 그 대상과 만나면서가 아니라 대상을 마주하지 않았을 때부터 생겨난다. 이미 정해진 생각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물러서지 말아야 할 것이기도 하다.
<그린북>은 혐오에 맞서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도널드 셜리 박사는 실존 인물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으며 3개의 박사 학위를 지닌 인물이었다. 이런 그가 보수적 성향이 강한 백인, 또 그 백인과 함께 노예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미주 남부를 유랑하는 이야기에 인종차별이 빠질 수 없다. 이런 이유를 강하게 들며 2019 아카데미는 이 작품을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작품의 개봉 당시에 도널드 셜리 박사의 유족들이 <그린북>의 이야기는 사실무근하다고 주장함으로써 흑인 서사를 무시한 영화라는 점이 화제가 되었다. 또한, <그린북>이 아직'백인 구원자'의 시각을 놓지 못한 서사라는 점은 흠으로 지적되었다. 왜 아카데미의 입장에선 최고의 영화가 흑인의 입장에선 빼앗긴 서사가 되는가?
선입견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곳은 언제나 경험하지 않은 순간이다. 영화의 초반부, 토니 발레롱가는 흑인 노동자들이 마신 음료수 잔을 '더러운 쓰레기'처럼 집어 쓰레기통에 넣는다. 이 단순하고 직관적인 묘사는 여전한 인종차별을 드러낸다. 이탈리아계 백인인 토니는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을 몸에 밴 습관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을 그저 희화하면서 드러내는 연출의 의도는 의심스럽다. 작품적으로도, 치열한 구성을 했다 보기도 힘들다. 다시 말해, 꼭 필요한 구성이었느냐는 말이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두 흑인 노동자는 그저 차별과 혐오가 나타나는 사건으로 소비되기 때문이다. 이건 다만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라 차별을 바라보는 태도에 관한 문제이다.
인종차별을 드러내는 방법
정치적 올바름으로써 차별받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드러내는 것, 혐오를 희화화하지 않는 것이 예술 작품의 독창성과 환기 효과를 저해한다는 말은 여기서 효력이 없다. 두 흑인 노동자가 그저 백인 노동자의 차별과 혐오를 현상하는 것으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흑인 노동자는 살아 있는 인물이 아니라 배경이며 혐오하는 타자에 불과하다. 그런 대상의 일종으로서 등장하는 셜리 박사는 일종의 전도를 겪는다. 발레롱가는 노동자이면서 백인이지만 박사는 고용주이면서 흑인이다. 이 극적 장치는 두 가지 측면을 위해 사용되었다. 하나는 계급적 전도를 통해 두 사람 간에 팽팽한 대립 구도를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어떤 것보다 강조되는 인종차별의 위력을 드러내려는 시도다.
계급적 전도는 흑인 대 백인, 고용자 대 피고용자의 구도로 일방적인 권력관계를 뒤틀리게 한다. 물론 여기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없다. 그냥 특별한 흑인이 있고, '재미있는 상황'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게 셜리와 발레롱가 사이에 대립각이 세워진다. 두 사람은 서로의 선입견을 관철하고자 한다. 발레롱가는 굳이 셜리에게 치킨을 먹이고, 셜리는 쓰레기를 다시 주우라고 말한다. 이 에피소드는 서로의 특색을 보여주는 주요 에피소드다. 맛난 음식과 편리한 생활을 추구하는 발레롱가, 그리고 도덕성과 바른생활을 추구하는 셜리의 성향은 서로 마찰한다. 이 사소한 마찰은 두 인물에게 인종과 계급이 결합한 강력한 동기를 선사한다. 즉, 노동자 계급이면서 백인인 발레롱가는 편안한 하루를 즐기는 것이 목표가 된다. 반면, 셜리는 자신의 차별받는 인종적 갈등을 벗어나려고 노력하면서도, 혐오와 갈등을 걷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운동가적 면모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발레롱가 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생활에서 드러나는 혐오는 모두 셜리를 향한다. 셜리 박사는 '그린북'으로 상징되는 '안전한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기품 있고, 학식이 높으며, 역사적인 곡을 연주하는 셜리 박사는 자신의 연주 끝에는 '평범한 흑인'이 된다. 그 흑인은 언제나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불법적인 사생활'을 영위해야 하며, 무기력하게 대항해야 한다. 지급할 대가가 있어도 좋은 숙소는 잡지 못하며, 아름다운 연주에 따른 찬사와 박수 뒤에는 뒷간 같은 화장실이 기다린다. 셜리에 대한 혐오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혐오는 그저 그런 전통에 불과하다.
나는 평생을 그런 취급을 받았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루를 못 참습니까?
운동가를 짓누르는 막의 무게
합리화된 불합리한 전통에 맞서면서 셜리의 운동가적 면모는 더욱 빛을 발한다. 그는 경찰서에서도 당당하게 맞서며, 발레롱가를 나무란다. 이 대사가 보여주는 셜리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살아 움직인다. 앞선 에피소드로 희생된 두 흑인 노동자와 달리 의사를 지닌 주체적 인물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가 추구해 온 갈등이 격돌하며 두 인물은 폭우가 쏟아지는 밤을 지새운다. 다시 차별을 맞이한 두 인물은 모두 적극적으로 대항하며, 흑인 사회 안으로 들어간 발레롱가의 전세 역전을 필두로 고고하던 운동가의 긴장을 해소하며 극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다사다난했던 길을 되돌아가는 복귀의 여정은 고단했던 여정만큼이나 길고도 멀다. 그 과정은 갈등을 풀고 남은 긴장을 날리는 비루한 과정이다. 무력한 결말을 향하는 소화이다.
그린북은 결말에 이르러서 다시 자신의 작품성을 저해하는 대단원을 선보인다. 로드무비의 구성에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은 가족주의와 그릇된 서사로 엮인다. 결국 여전히 운동하는 인물을 지켜보고 무리 안으로 유입시키는 서사가 주를 이룬다. 고고하던 운동가는 크리스마스의 포용과 화합의 아래 쉽게 무너지고 다소 억지스러운 화해가 결말을 선물로 포장한다. 흑인을 혐오하던 발레롱가가 흑인을 초대하고 그를 집안으로 들이는 개혁적 행위는 애초에 가족주의와 함께 묶일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마지막에 이르러, 셜리의 용기와 혐오에 대한 대항은 그저 가족주의로 포용 되기 위한 개별적 의지로 전락한다. 백인이 허용하는 때에 겨우 흑인이 집으로 들어선 것이다. 마치 60년 전에 버스를 탔듯이 말이다.
로드무비의 끝에 혁명적 전환이 일어나야 할 서사는 가족주의적 포용과 관습적 사랑의 나눔으로 종결된다. 이러한 관점은 여전히 선입견을 앞지르지 못한다. 누군가는 구원자이자 주체가 되고, 구원받지 못한 자는 타자가 된다. 주체가 바뀌지도 못한 채, 구원자가 일부의 피구원자를 구하는 서사가 지속한다. 여기서 혁명적 전환은 온데간데없다. 크리스마스라는 거대하고 화려한 장치는 이전까지의 흑인-서사를 단절시키며 대단원을 짓누른다. 여전히 전통을 고수한 채, 여전히 변화는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무너진다. 그렇기 때문에 아카데미의 선택이 더욱더 아쉽게 느껴진다. 찝찝한 변화의 바람은 매캐한 냄새만 실어 나른다.
<그린북>과 인종차별, 그리고 선입견
인종차별로 흥미를 끄는 영화 <그린북>은 두 인물의 변화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 처음에 영화는 선입견을 정면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여정의 와중에 인종 대립과 사회적 계급이 맞부딪히며 마찰한다. 이는 곧 두 사람의 갈등으로 이어진다. 둘의 갈등은 더욱 인종차별이 심해지는 남부를 배경으로 하며 더욱더 첨예해진다. 그러나 이 여정은 인종 대립을 해결하지 못하고 내어놓는 미봉책 같다. <그린북>은 이방인을 환대하는 가족주의적 사랑과 포용, 기본적인 인간애의 정신을 '다시' 꺼내 든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흑인은 가족이 아닌 이방인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혹은 선입견이 밀어내고 있는 한 집에 사는 가족인가?
여전히 한 집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뒤처진 시대의 일들을 따르고자 한다면 이 영화는 좋은 시도로 남을 것이다. 선입견을 가로지르지 못하는 어떤 생각은 여전히 그 선입견을 강하게 만들 뿐이다. 아직 이해와 동감을 건네지 못하는 불편한 가족이 있고, 자신의 혐오를 인정할 때 차별에 대항하여 한 발짝 나아가는 게 아닐까. 좋은 마음이건, 동정 어린 마음이건, 버스를 태워준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