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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우주나 Mar 25. 2019

녹록지 않은 현실에 빗댄 '우상'

영화 리뷰 <우상>

*해석은 개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상이란 그 어떤 것, 확연하지 않게 드러나며 막연한 환희를 안겨줄 것 같은 그것은 위태롭다. 우상은 스스로 믿음에 가깝기 때문에 위태롭다. 그것은 실체가 쓰고 있는 웃고 있는 가면이면서 동시에 실체의 표정을 숨겨주는 어두운 것이다. 우상은 한 흔적을 잡고 상상과 허풍을 섞어 거대한 상으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그러니 우상은 하나의 흔적을 실체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 '창조적' 과정은 착한 사람, 좋은 사람, 바른 사람이라는 정의로운 표현부터 수호자, 영웅에 이르는 부산물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미지와 우상 속에서 살아가는가? 아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실체를 볼 수 있는가? 

 찬찬히 살펴보자면, 우상이라는 개념은 시사하는 바가 다양하다. 이미지 속에서 우상은 실재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갖는 거리감만큼이나 크기를 느낀다. 다시 말해, 우상은 나의 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수록 강력히 작용한다. 그만큼 신비로움과 모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우상'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동조되고자 하는 역설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 영화 <우상>은 그러한 우상의 신비로움을 영화적 이미지로 대체하고자 하면서도 그 영화적 이미지들을 현실의 일부분과 매칭 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상의 진면모는 그 모호함과 신비 속에 있기에, 우상이 개인이나 하나의 것에 특정되는 순간 그 신비로움은 사라지고 만다. 

조선족의 이미지는 어디까지...

 <우상>이 보여주는 영화적 이미지들은 다채롭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은 오롯이 사실주의적 작화에서 드러난다. 즉, <우상>은 이미지들의 섬세한 배치에 꽤 신경을 쓰고 있다. 그것도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어떤 의미를 부여해내는 작업보다 자신이 가진 이미지 속에서 찾아는 일에 몰두한다. 이러한 <우상>의 독특한 이미지적 화법은 이미지와 사실주의의 묘한 관계를 드러낸다. 그런데 사실주의와 이미지는 별다른 교집합을 갖고 있지 않다.

 영화적 이미지는 그 자체로 현실적인 부분에서 드러나지만 동시에 비현실적인 추상을 포괄한다. 이미지는 단순히 현실의 사물들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자체적인 성질과 존재적 의의를 가진 어떤 살아있는 것이다. 이미지는 사물을 넘어 개별적으로 있다. 만약 이미지가 사물과 개별적이지 않다면, 단지 사과를 비추는 것만으로도 컴퓨터가 생각나는 이 묘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단순한 연상작용 너머에 이미지는 자신의 모양새를 갖춘다. 그것은 사물이 가진 딱딱함과는 별개의 것이며 오히려 그 성질에서 동떨어져 있다. 그런데 사실주의가 보여주는 모양은 그 성질을 기반으로 한다. 사실주의는 현실이 드러내는 존재감을 기반으로 한다. 바로 지금 현존하는 이 사실을 쫓아 만드는 것이다. 현실에서 드러나는 딱딱함이 사실주의가 주목하는 형태이다. 

 그러니 <우상>이 보여주는 형태는 다소 일방적 형세를 보인다. 이는 추상적이고 불확실한 이미지들을 딱딱한 사실들로 씌우려는 시도들이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영화 안의 시공간에서 다양한 시선들을 교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시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고자 한다. 2시간 30분에 이르는 러닝타임은 모두 그런 섬세한 그림 묘사를 위해 사용된다. 배경을 전체적으로 드러내는 컷이 있다면 다시 그 컷에서 작은 창문이나 문, 사람의 얼굴을 잘라서 쓰면서 전개된다. 반복되는 이미지들은 점차 자신의 의미를 확정한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의 이미지들은 다소 무겁게 가라앉는다. 딱딱한 사실들이 이미지의 활력을 짓누르며 전체적인 공기가 가라앉는다. 

뭐야 무서워 이거

 이러한 사실주의적 묘사는 두 가지 현상을 드러내게 된다. 하나는 관객에게서 시선에 대한 자유를 빼앗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명한 의미 전달이다. 관객에게서 시선의 주도권을 빼앗는 것은 여느 스릴러 영화가 사용하는 주된 방법이다. 관객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미지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도록 하면 영화는 자연스레 무서워진다. 눈을 감고 깜깜한 방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주도권을 빼앗으면서 영화는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준다. 스릴러 장르 영화들이 보여주는 대부분의 이미지는 '의미심장한' 상징들이다. 이러한 의미심장한 상징들은 나중에 결말과 함께 의미를 얻는다. 반면, <우상>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의미심장하지 않다. <우상>은 같은 의미를 지닌 이미지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 이미지는 너무나도 많이 반복되어서 나중에는 스릴러적 긴장감을 떨어트린다. 결국, 방에 무엇이 있건 무섭지 않게 된다.

 섬세하게 짚고자 하는 이야기들은 오히려 신경 쓰지 못하는 틈에 빠져나간다. 이야기의 한 구절과 다른 구절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시퀀스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 보통 한 시퀀스를 신경 쓰다 보면 다른 시퀀스에 힘이 빠지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모든 시퀀스가 좋은 구성을 가지고 있지만, 전체적인 시퀀스의 흐름이 어긋난다. 너무나 다른 이야기들이 붙어 있는 느낌이다. 시퀀스가 벌어지며 생긴 틈새로 풍부한 이야기들은 빠져나가고 허탈하게 남은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맴돈다. 덩달아 긴장감이 떨어지자 인물에 대해서 몰입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고서 <우상>은 그야말로 돌발적인 컷을 삽입하고야 만다.

얼굴이 사라지는 그런 장면이 있다..

 영화적 이미지, 사실주의, 스릴러 장르를 결합하려는 <우상>의 의도는 그렇게 어긋난다. 하나로 정렬되지 못한 시도들은 폭발적인 힘을 내지 못하고 갈림길로 사라진다. 분산 끝에 이미지들은 흩어지며 의미를 퇴색하고 사실주의적 공기는 혼자서 진지하게 내려앉는다. 스릴러는 공감을 얻지 못한 채 소멸한다. 배우들의 열연은 공감이 아니라 거리감을 얻게 되고, 이야기의 맥락은 어렵지 않지만 어렵게 꼬인다. 그리고 <우상>이라는 타이틀은 역설적으로 그 신비감이 단숨에 탄로 나는 것에 일조한다.  '우상'의 역설적 지향은 반대로 작용하고 만다. 아쉽게도, 좋은 시도들은 좋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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