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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우주나 May 30. 2019

정해지지 않은 것을 상상하다

연극 <어나더 컨트리> 리뷰

*해석은 개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속한 곳이 하나라고 할 때, 우리가 나아갈 장소와 공간들은 모두 지금의 하나와는 다를 것이다. 분명 지금과 동일하지 않은 것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진보에 대한 공상은 적어도 사회에 대한 믿음, 정의에 대한 믿음, 미학적 완벽함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속한 사회가 아름답고, 정의로우며, 완전한 사회가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다는 믿음. 이 믿음은 그 믿음을 가진 누군가에게 빛을 비추는 등대처럼 환하게 길을 밝혔을 것이다.

 <어나더 컨트리>가 보여주는 공간에는 다양한 생각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연극의 초반부부터 펼쳐진 방대한 대사는 그들의 가치관을 그대로 담아내고자 하는 일장 연설이다. 이 연극은 1930년대의 영국 명문 공립학교를 배경으로 열정적인 청년들의 일상사를 보여준다. 가이 베넷과 토미 저드를 비롯한 네 명은 각자의 꿈을 꾸지만 기숙사의 규율과 맞부딪히며 좌절한다. 이 중에서도 절친한 두 친구 가이와 토미는 서로 낭만적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성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 데비니쉬와 멘지스는 각각 소극적인 보수주의와 현실주의를 대표한다. 여러 사회사상들은 방대한 대사와 함께 청년들의 생활에 녹아든다. 

 이 '작은 사회'는 격동적인 1930년대 초의 분위기를 그대로 계승한다. 낭만적 자유주의, 공산주의, 소극적인 보수주의와 현실주의는 마치 가이, 토미, 데비니쉬와 멘지스의 대명사와도 같다. 어떤 하나의 정치사상이 일반적이지 않고 서로가 충돌하던 때의 모습들이 연극 속에서 재현된다. 그 혼돈 속에서 갈등은 극단적으로 빚어진다. 각본가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캐릭터들을 충돌시키며 '작은 사회'의 실험을 이어나간다. 


*주의 : 아래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용이나 주요 대사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파울러는 학교의 규율과 통제를 전적으로 신봉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그가 기숙사 전체를 총괄하는 기숙사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네 친구는 서로를 도와주기로 한다. 멘지스는 자신이 기숙사장이 되기 위해 가이와 저드에게 자신을 도와 기숙사를 관리하는 '프리펙트'가 되길 원한다. 하지만 저드는 공산주의자로서 '프리펙트'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멘지스는 가이에게 저드를 설득해 저드가 '프리펙트'가 되면 가이가 학교의 총학생회 격인 '22'가 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제안을 한다. 그런데 가이가 자신이 사랑하는 다른 기숙사생, 제임스 하코트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 파울러에 의해 밝혀지며 가이는 동성애를 금지하는 기숙사의 규율에 따라 체벌을 받게 된다. 가이가 체벌을 받고 '명예'를 실추하자 멘지스는 가이가 아니라 데비니쉬를 '22'로 임명한다. '22'가 되지 못한 가이는 분노하며 복수를 예고한다. 그리고 시간은 처음과 같이, 소련으로 망명했던 가이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막이 내린다.

 연극이 진행되는 굵은 줄기를 따르자면, 가이는 자유롭고자 하는 행위 즉,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을 좇지만 그것이 기숙사-사회-의 규율에 막혀 무너지는 단순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단순함 속에서 규율과 통제는 왜 필요한지, 옳은 것은 무엇인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옳은 것일 수 있는지 하는 다양한 문제들이 흩뿌려진다. 무수한 질문들이 드러나며 지독히도 평면적인 캐릭터들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이어나간다. 마치 사춘기의 치기에 가득 찬 듯, 그 누구도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는다. 저드는 자신의 신념을 저버린 듯 '프리펙트'를 수용하지만, 이를 합리화하며 자신의 신념을 보호한다. 가이의 경우도 유사하다. 가이는 낭만적 자유주의를 신봉하며 이 믿음이 다시 그가 학교와 파울러에 대한 복수를 예고하고, 후에 스파이가 되고 망명하여 '국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나아간다.

 '국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가이의 생각은 <어나더 컨트리>에서 제시하는 최종적인 결말이다. 바로 지금 속한 국가, 사회, 규율로부터 벗어나 다른 국가, 사회, 해방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가이는 최종적으로 영국에 의해 잡힌 '실패한 스파이', '실패한 망명자'이다. <어나더 컨트리>는 가이를 통해 이러한 선택이 실패했으며, 그의 공상이 무너졌음을 이야기 전체를 서술하는 망명자 가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망명자 가이가 학생 가이를 서술하는 관점은 3인칭에 가깝다. 가이는 막이 내리기 전, 누구도 그립지 않다고 말한다. 누구도 보고 싶진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다만 크리켓이 그립소."

1984년작 영화 <어나더 컨트리>

 이 대사는 상이한 사상을 가진 친구들이 서로 충돌하면서도 공존했던 그때를 그리워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달리 생각하자면, 이 대사는 그런 크리켓을 하면서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자신이 선택할 필요조차 없었던, 어떤 결정을 내리길 강요받지 않았던 그때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가이가 크리켓에 나서서 자신의 차례에 바로 아웃된 것만 보아도, 그는 크리켓을 다만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크리켓을 하고 바로 아웃되어 버리던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가이는 '어나더 컨트리' 선택했다. 자신의 하나와 또 다른 무언가를 선택한 것이다. 그의 망명은 다른 사회, 국가, 해방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런데 가이는 다시 하나(one)를 마주한다. 또 다른 하나(another)는 다시 하나(one)와 유사하다. 또 다른 국가, 사회, 해방은 또한 하나의 국가, 사회, 규율을 제공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다시 하나를 마주한다.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세상에 단 하나의 국가도 남지 않는 이상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국가이거나 또 다른 국가들일뿐이다.

 그렇기에 <어나더 컨트리>가 마주하는 결말은 다소 허황되기까지 하다. 어떤 문제들도 정리되지 않은 채, 인물들은 극단으로 밀어붙여지지만, '작은 사회'의 규모는 다소 극적이지 않았다. 1982년에 선보인 연극인 만큼 우리에게는 '과거'의 이야기들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가이와 저드, 데비니쉬와 멘지스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생각이고 방식들이기 때문이다. 

 <어나더 컨트리>가 보여주는 것은 파레트와도 같다. 누구나 성장기에 - 다소 표본이 축약적이지만 - 어떤 믿음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정의 내리고 그것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변화를 겪는다. 다양한 색이 뒤섞이고 충돌한다. <어나더 컨트리>는 망명자 가이와 학생 가이의 이야기를 완전히 생략함으로써 공백을 만든다. 그리곤 마치 원색적인 인물들을 통해 여러 물감통을 채워 놓고, 당신은 공백을 어떻게 채울 것이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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